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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자 치는 snoopy Feb 17. 2023

의역과 오역 사이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어떤 번역본으로 책/영화를 처음 접했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인상이나 감상이 전혀 달라진다. 가장 흔한 예로, 한국의 무수한 <삼국지> 번역본 중에 나는 가장 많이 팔린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를 열렬히(?) 싫어한다. 황석영의 삼국지나 장정일의 삼국지, 정비석의 삼국지도 내가 어려서 처음 읽은 박종화의 삼국지를 넘지 못했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마찬가지다. 11편의 번역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편한, 익숙한) 판본은 민음사 김욱동의 번역본이다. 김영하 작가의 번역본은 술술 잘 읽히지만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새로운 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영화의 경우는 책보다 더 예민하다. 짧은(한정된) 시간 안에 의미를 압축해 전달해야 하는 영화 번역 자막의 특수성(화면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글자 수가 16자) 때문에 의역이 용인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슈렉 3>에 나온 "The Shrek has OGRE."란 카피를 "그날이 오거 말았다" 라고 번역한 것이나, "적을 무찌르러 과자" 같은 말장난, 심지어 원어의 의미를 한국 사회의 유행어로 대치해 버리는 이미도의 지나친 의역은 극의 몰입을 방해하고 흐름을 끊어버린다. 


이미도 정도는 우습게 제끼고 마블 팬들의 공공의 적이 된 박지훈은 <007 스카이폴>에서 “She’s pretty if you like that sort of things(네가 그런 취항이라면, 그녀가 마음에 들 거야)”를 “예쁘네요. 된장녀 같지만”으로 변질시켜 의역했고, <어벤져스 3>에서 그 유명한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지막 대사 "We're in the end game now"를 "이젠 가망이 없어"로 오역하면서 AI가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게다가 타노스에 의해 소멸되면서 미처 끝맺지 못한 닉 퓨리의 마지막 쌍욕 "motherfu.."를 "어머니..."로 번역하다니. 







그럼에도 이미도는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 번역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영화 번역 작가들의 기본적인 원칙은 원래 대사의 의미와 표현의 맛을 가장 정확하게 살리는 것이다. 여기엔 각국의 문화적 배경이 반영돼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영화 ‘타짜’에 나오는 대사인 “나 이대 나온 여자야”를 미국 관객들에게 “I graduated Ewha university”라고 직역해서 보여주면 사람들은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 적절한 번역은 “You know who I am?” 정도가 될 것이다. 의미를 전달하는 원칙을 고수하되 언어에 담겨 있는 문화나 정서가 반영돼야 한다.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이윤기 선생은 “번역은 ‘밴 아이’를 낳는 거고, 소설 쓰기는 ‘안 밴 아이’를 낳는 것이지만 번역 역시 안 밴 아이를 낳는 것에 견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나 역시 안 밴 아이를 낳는다는 자세로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외줄 타기다. 두 개의 기둥은 직역과 의역이다. 보는 사람들은 편안하지만 외줄을 타는 광대는 첫 번째 공연이건 백 번째 공연이건 피를 말리기 마련이다.》


밴 아이를 낳든, 안 밴 아이를 낳든, 해당 언어에 담겨 있는 문화나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 충분한 고민을 하고 그 의미를 충실하게 살려 번역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럴 때 논란이 되는 것이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  


직역과 의역의 범위는 워낙 넓지만, 가장 간단한 예를 생각해 보자. 영어의 관용적 표현에 “piece of cake”가 있다. 이걸 “케이크 한 조각"이라고 옮기면 직역이고 “식은 죽 먹기"라고 옮기면 의역이다. 그런데 “piece of cake"를 “케이크 한 조각"이라고 옮기면 문맥적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식은 죽 먹기"라고 의역하는 것이 의미의 이해에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아래 글에 예시된 경우를 보자. 나는 '영어 빙신'이지만 유럽 중세 배경의 소설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군"이라는 번역문이 등장하거나, 1930년대 배경의 미국 소설인데 "자기가 무슨 암행어사라도 된답니까"라는 표현이 나오면 나라도 읽던 책을 덮어 버릴 것 같다. 지나친 의역이 텍스트에 관한 몰입을 방해하고 흐름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co_free&wr_id=240702



아마추어 번역가들이 영화 자막을 만들고 공유하는 자막 사이트에서 벌어진 이 토론의 논쟁점은 크게 두 갈래의 입장으로 나뉘는 듯하다. 독자/관객이 의역 표현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번역가가 어디까지 창작(의역)을 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논쟁. 


"speak of the devil"의 예를 보자. 한국어로 "악마가 내 말을 들었나 보군"으로 번역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라고 번역해야 의미 전달이 수월하겠지만 이 번역 역시 정확한 게 아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는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공교롭게 그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를 뜻한다. 물론 그 속뜻은 '자리에 없는 사람을 흉보거나 비방하지 말라'는 경구의 의미도 있지만, "speak of the devil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도 마땅한 한국어 번역이 없다면, "speak of the devil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도로 표현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그래서 잘 된 의역의 예로 달 시 파켓의 <기생충>을 번역을 얘기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편이다. 달시 파켓은 한국어 대사 '서울대 문서 위조 학과'를 '옥스퍼드대'로 번역하고, 외국인들에게 생소한 '짜파구리'를 라면과 우동의 합성어 'ramdong'으로 번역했다.


그렇다고 의역이 모두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건 아니다. 한국 출판계와 다르게 해외에서는 번역이라는 작업을 2차 창작물로써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채식주의자>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는 상당한 의역을 통해 한국의 낯선 문화와 감수성을 영국에 소개했다. 한 인터뷰에서 데보라 스미스는 "번역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인 감수성이에요.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더 중점을 두죠. 그것이 독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번역은 시를 쓰는 것과 같아요"라고 말했는데, 그녀의 의역을 통해 <채식주의자> 본래의 본질이 훼손되거나 왜곡됐다는 비판이 거셌다.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 게 잘 된 번역이다'라는 말은 하나의 이상이다. 완벽한 번역은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영어 번역가들이라 하더라도 서정주 시어의 말맛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은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할 거라는 얘기가 있다.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겠네" 같은 시구를 대체 무슨 수로 번역한단 말인가? 챗 GPT가 무섭게 진화해서 언젠가 "오매 단풍 들겠네"의 말맛을 제대로 살린 번역문이 나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


소설 번역과 영상물 번역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소설 번역본의 경우 독자가 생각하고 이해할 시간이 충분하지만, 영상물 번역은 한정된 짧은 시간 안에 시청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압축적으로 번역하는 게 관건'이라는 의견에 공감한다. 그래서 '영화 자막 번역에 함축적인 의역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 역시도. 소설의 경우엔 과도한 의역이나 시의성에 민감한 표현(유행어,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표현)이 무조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번역 #직역이냐의역이냐 #번역의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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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과 의역, 그리고 오역에 관해 생각하며 재미나게 읽은 글 :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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