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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 Jan 25. 2021

86. 비내리는 서울

비 내리는 서울. 내 이름의 풀이다.


지극히 단순한 두 글자가 붙어 어딘가 추상적인 이름이 되었다.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면 모두 똑같이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한 나라의 수도에 내리는 비처럼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대화의 방향에 따라 뜻을 이해하기 쉽게 변경해 알려준다.

종교적인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이미지적인 느낌으로 해석해주기도 한다.

만나는 사람에게 맞추어 설명해주면, 이름 뜻을 물어본 사람들은 외려 더욱 만족한다. 남의 이름이지만, 본인의 가치관에 맞게 되니 아무래도 다가오는 바가 큰 듯하다.

그 점이 참 좋다.  누구를 만나도 '좋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향수와도 같아 은은하게 남의 기억 안에 남아있는다.


물론 이름의 뜻은 타인이 느끼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름은 어떤 의미로는 자기 자신에게 매여지는 굴레와도 같으니까. 내 삶의 이미지가 바라던 바라지 않던 그 이름과 맞게 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의 뜻을 알고, 자기가 지신의 이름을 듣고 말할수록 사람은 점점 그 이름에 걸맞게 변한다. 나는 그렇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변하기도 하고, 싫어하더라도 어쩔 수 없게 끌려갈 수도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름에 맞는 사람이 되어간다.


본 뜻대로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아직은 모자라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비가 내리는 서울 같은 사람이라면 그건 어느 정도 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비가 내리는 서울 같은 사람이라니. 뭐라고 상상하기도 힘든 사람 같지만 내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게 그것 말고는 없다.


추적인다. 발을 한 걸음 떼면 뗄수록 축축해진다. 우울할 때면 한 없이 다른 사람까지 젖게 만들고 만다.

밤이 오면 어디까지가 도시의 끝인지 알 수 없게 고요하고 깊다. 깊은 도시의 뒤편에 무엇이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듯 내 마음속 어느 곳에 무엇이 숨어있는지도 알 수 없다. 나조차도 모르니, 다른 사람들은 더욱 알 길이 없다.

동시에 모든 소란은 빗소리로 잠긴다. 사람들의 발소리도 정체된 길의 엔진 소리도, 음식점의 호객용 음악도 모두 빗소리와 함께 쓸려나간다. 남는 건 오로지 비와 나뿐이다.

그렇게 나는 나와 대화한다. 다른 모든 이들보다 먼저 나와 대화한다. 서울 강남대로 한복판, 눈도 뜰 수 없는 빗속에서 고요하게 나는 나와 빗소리로 대화한다. 다른 이의 간섭은 있을 수 없다. 내 옆에만 와도 쏟아지는 비에 파묻혀 젖어버릴 것만 같아 많이들 피한다


이름대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영향력이 큰 사람은 아직 되지 못했지만 서울에 퍼붓는 비처럼 나는 누군가 접근하기도 힘든 나만의 고요한 세계를 만들었다.

즐거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보이지만,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언제나 비를 맞는 듯한 사람이 되어버린 내가 좋다. 이유는 몇 가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주변에 나를 믿어줄 사람만 남기에 그렇다.’

섣불리 빗 속에 뛰어들어 축축하게 젖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만큼 비를 좋아하거나, 이미 흠뻑 젖어있는 사람이라야 끝을 모르는 서울 거리의 빗속에 우산 없이 발을 들일 수 있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이들은 아니지만, 모두 같은 색깔을 띤 사람들, 맘 속 어딘가에 가랑비 일지, 여우비 일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비를 가진 사람들이 곁에 모인다.

좋은 친구 한 사람 찾기 힘든 요즘 시대에, 이름 같은 사람이 되어 믿을 수 있는 빗물에 번들거리는 장화를 신은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름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냥 되는대로 끼워 맞춘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이름이 그 뒤에 붙여진 것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를 그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곧, 이름을 개명할지도 모른다. 여러 이유로 두 번째 이름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난 27년 동안 비 내리는 서울을 내 명패로 걸고 그 이름처럼 살았다.

어떤 이름으로 살게 되어 그 이름에 맞는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속 한 켠에는 비에 산란되는 네온사인이 비추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습기를 좇아 온 여러 사람을 또 만나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축축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을 만날지. 그리고 그와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기대가 된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비 속, 광화문 거리를 거닐 사람이라면, 나와 함께 걸을 것이다. 같이 밤을 지새우며 빗소리로 대화할 것이다. 싫은 기억은 빗물에 닦아내면서.

비 내리는 서울 속에서 함께하리라. 그런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면, 결국  처음 이름을 지을 때 원했던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서울 어디서든 내리는 비 처럼 영향력이 큰 사람말이다.

꽤 특별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이름 덕분에, 이름대로 살아가게 되어서. 그래서 난 이 이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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