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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우연이 머무는 길

베를린에서 새로고침 중

by 이나

트리샤를 처음 만난 건 7년 전, 호주 퍼스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였다. 그녀는 한국에서 알게 된 친구 킴의 룸메이트였는데, 막 GP(General Practitioner, 1차 진료 의사)로 첫 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이었다. 내가 장기로 머물 방을 찾기 전까지 두어 달간 함께 살기도 했고, 가끔 킴과 어울려 함께 놀기도 했지만 단둘이 따로 약속한 적은 없는,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정도의 사이였다.


워킹홀리데이가 끝난 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트리샤와는 ‘언젠가 서로가 호주나 한국에 가게 되면 꼭 보자’는 흔한 인사말을 남긴 채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작년에 내가 영국으로 오게 되었을 때, 그녀가 호주에서의 의사 생활을 접고 맨체스터에서 몇 달간 공부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킴을 통해 들었다. 반가웠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지 오래되었고, 호주에서도 단둘이 만남은 없었기에 그저 ‘운이 좋으면 마주치겠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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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뒤, 영국 런던에서 한 회사의 오퍼를 받고 입사 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던 중 믿기 힘든 우연이 찾아왔다. 에딘버러에서 Isle of Skye로 향하던 나는 위스키로 유명한 탈리스커(Talisker) 양조장을 향하던 길이었다.


구불구불한 1차선 비포장 도로에서 갑자기 맞은편에서 거대한 캠핑카 한 대가 다가왔다. 오랜만의 인적이라 호기심 반 반가움 반으로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캠핑카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순간, 창가에 앉아 있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트리샤였다.


나는 후다닥 창문을 열고 "트리샤!"를 외치며 경적을 울렸다.


그렇게 우리는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처음 만난 뒤, 7년 만에 스코틀랜드의 오지에서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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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그녀의 캠핑카가 머문 작은 공동묘지에서 다시 만나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함께 끓여 먹고, 후식으로 그녀가 끓여준 차이티를 마시며 그간의 이야기를 풀었다. 그녀는 오랜 공부 끝에 의사가 되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다 결국 유럽으로 건너오게 되었다고 했다. 예전에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결혼해 아이를 키우고 있고, 특히 가장 친했던 킴과 수웬은 사이가 틀어져 더 이상 다같이 모일 수 없다고 했다.


7년이라는 세월은 길었지만, 이런 극적인 우연은 냉소주의자인 나조차도 운명을 믿게 만들 정도였다.


그 후의 만남은 시간을 내어 서로가 서로를 찾아가며 만들어 나갔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재회 뒤 몇 달 후 나는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 그녀를 만나러 갔고, 다시 몇 달 후에는 그녀의 초대를 받아 런던 남부와 콘월을 2주간 캠핑카로 함께 여행했다. 지난 달에는 그녀가 남자친구와 함께 베를린에 놀러와 저녁을 먹고 산책을 했다.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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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날 때마다 상황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호주에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워킹홀리데이를 하던 백수에 가까운 청춘이었고, 그녀는 막 의사가 된 시점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나는 첫 해외 직장 생활을 앞둔 설렘에 차 있었고, 그녀는 유럽에서의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여행자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맨체스터에서는 그녀가 네덜란드에서 일을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나는 짧은 직장생활 끝에 번아웃에 지친 직장인이었다. 콘월에서는 나도 그녀도 각자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취준생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삶의 자리를 잡아가던 동안, 우리는 여전히 이동 중이었다. 방황인지 자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슷한 길 위에서 반복해 마주쳤다.


호주에서는 단지 어울리는 친구 중 하나였던 그녀가, 이제는 드물게 연락만 주고받아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듯한 존재가 되었다.




‘우연’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테레자가 떠오른다.

아마도 우연한 만남에 가볍지 않은 의미를 두고,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 울림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들이 일어난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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