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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유진 Apr 08. 2023

열심만으로 안 되는 것들

나의 첫 시험관 시술 실패

금요일 오후 5시 남편과 더히트코인노래방에 갔다. 


남편이 일도 없고 상사도 없는 금요일 오후라며 반차를 냈다. 금요일의 SRT 열차는 예매 전쟁인데, 기적적으로 입석 티켓을 끊어서 기어코 서울로 왔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걸 하자면서. 


"코인노래방 가자! 5천원에 12곡." 

어떤 노래로 시작하고 끝내고 싶은지 느낌이 왔다. 


필히 노래방에 가야겠다는 결심은 병원에서 온 전화 한 통에서 확고해졌다. 시험관 1차 시술 후,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첫 단계인 피검사에서 0.01 그러니까 비임신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피검사 며칠 전부터 임신테스트기 1줄(비임신)이 떠서 기대도 안 했다. 


임신에 실패한 경험이라면 수도 없이 많은데, 이건 실패가 아니라 이별 같았다. 꽃봉우리 같던 배아의 세포 사진을 봐서 그런가. 배아를 올려 둔 얇은 봉이 내 자궁 안으로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 나도 모르게 “엄마가 잘 품을게”라고 속으로 다짐해서 그런가. 


의사 선생님은 이 말을 덧붙이셨다. 다음 차수를 위해 남겨둔 수정란 8개 모두 세포 분열을 멈추어서 폐기되었고, 다시 난자 채취부터 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은 난소가 부어 있으니 3개월 쉬었다가 시험관 2차 시작하는 걸로 생각하라 하셨다.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3개월 동안 또 기다려야 한다니! 우리 둘 다 건강상 문제도 없고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배아 배양 기술로는 탑급 난임센터병원에 다니고 있다. 모든 조건이 좋은데 동결시킬 배아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건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병원에서 내게 권하는 것은 내 몸을 약물로 더욱 정밀하게 제어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장기요법이 있다. 배란 시키는 호르몬을 강제로 멈춘 다음, 오직 주사로 투입되는 약물에 의해서만 배란이 이뤄지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난자질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가장 고민이 되었던 건 NK(Natural Killer)세포 검사 여부였다. NK세포는 암세포를 죽이는 세포로 수치가 높을수록 좋다. 그런데 생식학계에서는 NK세포가 높을수록 자궁이 배아를 적으로 여겨 착상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래서 NK세포 수치가 높은 사람에게 약을 써서 면역력을 일부러 낮춘다고 한다.


얼마 전 아버지의 건강검진 결과지를 같이 보다가 아버지의 NK세포가 매우 높다는 걸 알게 되었다. NK세포 수치가 500만 넘어도 매우 건강하다고 보는데 거의 1000에 육박한 수치였다. 혹시 유전적으로 나의 NK세포 수치가 높다면, 착상 확률을 높이기 위해 면역력을 낮춰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면역력을 낮추는 약은 너무 독하다. 정부에서 쉽게 처방되지 않게 규제하고 있고 부작용도 있다. 


나의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약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동시에 그 정도로 아이를 갖는 것이 간절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 그런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러니 노래방에 가지 않고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어디든 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코인노래방 8번방에 남편과 나란히 앉았다. 시작은 90년대 세기말 감성의 이별 노래다. 롤러코스터의 <습관>을 골라보았다. 고음을 지르지 않아도 되고 담담하게 말하듯 부르는 게 마음에 든다. 아련함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그 감성도 과하지 않아서 편안하다.


습관이란게 무서운거더군 아직도 너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사랑해 오늘도 얘기해 믿을수 없겠지만 안녕 이제 그만 너를 보내야지


워밍업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춤추는 시간이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지드래곤과 박명수의 <바람났어> 등등 나의 20대를 함께한 2010년대 댄스곡들을 불러준다. 코인노래방의 끝은 반드시 희망차야 했다. 마지막 곡은 김윤아의 <Going Home>이 완벽하다.


그저 너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밖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재능과 열정, 의지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열심만으로 안 되는 것들’이란 세계로 입장하고 나서부터 마주한 문제들은 대체로 ‘어느 시점에 노력을 그만해야 할까’로 귀결된다. 답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 열심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는 아닌 것은 알아 차렸으니 내 탓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나에게 생기려면 나에게 더 친절해져야 한다는 다짐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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