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ly Mar 05. 2021

제너레이터 세상에 사는 매니페스터

[내가 만난 휴먼 디자인]23.  여성 매니페스터의 조건화  ②

(이전 글 : 여성매니페스터의 조건화 ① - 여성, 그리고 매니페스터)


                                                                                                            

■  제너레이터 세상에 사는 매니페스터


휴먼 디자인을 알고 내가 매니페스터임을 알게 된 후 7년이 지났다. 때때로  ‘내 삶은 과연 더 나아졌는가’ ‘나아졌다면 어떤 측면이 나아졌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일까’를 묻곤 한다. 어쨌든 어떤 지식이든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기에. 


글쎄. 뭔가 드라마틱 한 어떤 변화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그런 이벤트는 없다. 하지만 아우라 측면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다양한 인식들은 어느 정도 불편함을 동반할지언정, 분명 이전보다 삶을 수월하게 영위하게 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유독 부쩍 느끼게 된 사실인데, 매니페스터에게 있어서 겪는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세상이 제너레이터 세상이라는 점이다. 매니페스터의 ‘닫혀있고 쫓아내는’ 아우라를 받아들이고 나니, 유독 이 세상이 제너레이터 세상임을 여실히 더욱 느끼게 된다. 전 인류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제너레이터는 열려있고 포용하는 아우라를 갖고 있는데, 아우라 측면에서 이 세상은 진정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정말 포용적이고 따뜻한 세상인 게 맞다. 제너레이터는 정말 활~짝~ 열려있다. 


제너레이터 세상에서 제너레이터로 살도록 완벽하게 길들여지고 조건화되어 성인이 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제너레이터처럼 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제너레이터와 잘 어울리며 조화롭게 지내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열려있고 친절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을 다해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와 보니 그렇게 열심히 잘 살아보겠다는 나의 부단한 애씀과 성실했던 노력은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한 처. 절. 한. 몸. 부. 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든 항상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닌, ‘지금'은 어떠한 가다.   


 ■  난 지금 '매우 소극적' 의미에서의 매니페스터로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매우 소극적’ 의미에서의 매니페스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적극적이지 못한, 어느 정도 방어적 상태에서 머무르고 있는 수준의 상태 말이다. 


스스로 ‘매우 소극적’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지만,  사실 이 수준까지 오는 것만 해도 나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거대한 사건이다. 내가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매니페스터의 ‘닫혀있고 쫓아내는’ 아우라에 대해서 이렇게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를 나만이 기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3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매니페스터의 아우라를 수용한 후, 제너레이터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한 노력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를 통해 나에 대한 ‘존중감’을 느끼고 있다. 


전 인류의 8%밖에 되지 않는 매니페스터는 사실상 소수자다. 비주류, 아웃사이더라는 얘기다. 더 이상 난 아우라 측면에서 이 세상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좋은 사람’라는 평가를 받는 것을 포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시선을 어느 정도 포기하니 그 자리에 나에 대한 ‘존중’이 자리 잡았다. 나에 대한 존중감은 더할 나위 없는 내면의 만족으로 이어지고, 그 만족이 상당히 크기에 다른 사람의 평가로 인해 나를 포기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둘째, 매니페스터의 아우라를 수용한 후, 아우라 침범으로 인한 분노를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누군가가 먼저 내게 다가오는 것은 아우라 침범이다. 그 누군가가 설령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이것은 정신적 영역이 아니고 물리적인 아우라의 영역이기에.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사람들이 자꾸 내게 다가오는 게 끔찍이 싫은지 말이다. 누군가가 자꾸 내 옆으로 오려고 할 때 속으로 난 멀리서부터 이미 이렇게 외치곤 했다. ‘나한테 오지 마’ ‘나한테 오지 마’. 그리곤 스스로를 다그쳤다. ‘너 정말 성격 이상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잘 포용하고 살가운데 넌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넌 정말 별종이야’


다행인 것은 이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에서 빈번히 아우라 침범을 당할 때면 아우라에 대한 이해와 함께 분노가 빠른 시간 내에 사그라든다는 것이다. 설령 빨리 사그라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에 상당 부분 괜찮다. 만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사전 또는 사후에 그 공간을 떠나는 등의 적절한 능동적 대처도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아주 단순히 아우라의 작동 메커니즘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유익이다. 


셋째, 매니페스터의 아우라를 수용한 후,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상에서의 스트레스가 현저하게 줄었다. 


난 회사에서 사내 메신저를 항상 on 상태로 두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경우만 선별적으로 사용한다. 회사라는 곳은 사실 내가 자발적으로 들어간 곳이다. 그래서 같은 회사라는 울타리를 공유하고 있는 구성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에 암묵적 동의를 한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중요하거나 긴급하지 않은 불필요한 메시지 수신은 분명 아우라 침범과도 같은 양상으로 다가온다. 같은 이유로 단체 카톡 방 또한 선별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식의 대응만으로도 온라인상에서 커뮤니케이션 스트레스는 상당 부분 줄고 있다. (다양한 맥락과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오프라인상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경우는 그 양상이 훨씬 더 복잡하므로,  앞으로 실생활에서 다양한 사례를 모아 지혜로운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  '닫혀있고 쫓아내는' 아우라는 분명 어렵다. 그러나 ...


매니페스터 아이를 낳은 산모는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조차도 이 아이가 자신을 밀어낸다는 느낌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닫혀있고 쫓아내는 아우라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분명 어렵다. 더군다나 그 비중이 8%밖에 되지 않는 소수자로, 완전히 반대 성향을 가진 제너레이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 어려움은 충분히 더 가중될 수 있다. 어떤 영역이든 소수자는 늘 소외되므로. 


내가 내 아우라에 대해서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듯, 주변 사람들이 내 아우라를 충분히 불편해할 만하다는 느낌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매니페스터에 대해 덜덜 떨린다거나 ,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거나, 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거나, 없었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주변 사람들의 흔한 피드백은 나에게는 사실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꽤나 민감하고 예민하기까지 한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아 그 말이 마음의 상처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뭘 저렇게까지’. 


이렇게 자신의 영향력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불편한 존재라는 것 또한 매니페스터의 아우라가 갖고 있는 한계임을 수용해본다. 


더 근본적으로 삶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은 거의 100% 진실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고단하다. 나는 이런 것 때문에 힘들고, 당신은 저런 것 때문에 힘들다. 나는 이런 이유로 어렵고, 당신은 저런 이유로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크기를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상 삶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필요한 일이다. 고통의 정도는 매우 주관적이므로.


그러기에 이제는 이 모든 한계, 불편함 등에도 불구하고, 어떤 불편함, 어려움보다는 이 불편한 아우라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집중해본다. 그렇게 내가 나를 존중하는데서 오는 그 기쁨에 더욱 집중해본다. 그리고 상대의 존재 또한 깊이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에 집중해본다. 


이런 과정 가운데 언젠가는 ‘매우 적극적’ 의미의 매니페스터로 살아가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64개 관문이라는 렌즈로 바라본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