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과 이별하는 일 D-9
일주일 넘게 병상에 누워있었고, 눈을 떠보니 9일이 남았다. 마지막 둘째 주는 거의 침대에서 보냈기 때문에 마지막 주라도 짐 정리를 빨리 하면서 남은 런던을 즐겨야 한다. 이놈의 바이러스 때문에 일주일이 통째로 날아가다니 약간 분한 마음까지 든다. 그래도 어쨌든, 역시 몸 건강한 게 최고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각골명심하는 기회가 됐다. 어디서든 아프지 않는 게 최고다.
며칠 동안 거의 식음 전폐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현재 내 최고의 관심사는 음식이다. 당장은 냄새가 심한 음식은 못 먹지만 머지않아 며칠 내로 회복이 될 거고, 마지막 날은 어디 가서 뭘 먹을까 하는 고민마저 든다. 영국 '전통' 음식이 내 입맛에 맞았다면 물론 마지막 날엔 영국 음식을 먹겠지만, 선데이 로스트,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피시 앤 칩스 그 외에 다른 영국 전통 음식들 모두 마지막 날을 기념하며 먹고 싶은 음식은 아니다..
그래도 영국 디저트는 무지 좋아하는 편이니, 비행기에서 먹을 포트넘 앤 메이슨에서 얼그레이 쇼트 브레드를 여러 개 쟁여가야겠다. 빅토리아 스펀지와 스콘도 한 번씩은 더 먹어야 한국에 돌아갔을 때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홍차와 잘 어울리고, 모양은 그다지 예쁘지 않지만 투박한 맛이 매력적인 영국 디저트들.
최후의 만찬으론 아무래도 지중해식 해물찜이나 구이를 먹고 싶다. 이상하게 나한테 유럽식은 늘 그리스나 스페인에서 먹을 법한 신선한 해물과 레몬즙이 가득 뿌려진 해물찜으로 다가온다. 한국 해물찜과 다른 비주얼이기 때문일까? 푸짐하게 담긴 해산물은 한국식이나 지중해식이나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 물론, 생선 구이나 찜도 빠질 수 없다.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직접 찾아서 생선을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영국은 섬나라임에도 불구 해산물이 비싸서 직접 찾지 않으면 먹을 일이 없어서인지, 외식할 때 해산물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만 갖는 게 아닌지 친구들도 종종 타파스를 먹으러 가자는 얘기를 하곤 한다.
영국에서 거주하는 내내 정말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이 음식이었다. 아무리 환경이 척박하고, 날씨가 안 좋다 한들 이렇게 까지 요리법이 발달되지 않을 수 있나 싶었다. 옆 나라가 미식의 나라, 프랑스인데 어떻게 영국은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맛없는 음식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섬나라인데 생선을 왜 튀기기만 했을까..(피시 앤 칩스에 희생되는 아까운 대구들..) 왜 섬나라 사람들인데도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하는 수십 가지 의문들이 들었다.
영국에서 생선 소비량이 적은 이유가 생선 가격이 높아서, 생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선이 부패할까 봐 소비자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등의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애초에 지형상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궁금할 뿐이다. 보통 섬나라에 살다 보면 생선을 많이 보고 그로 인해 공포심이 줄어들고, 보관 방식도 세대를 따라 전승되고 이런 것 아닌가? 영국 음식에 별 기대와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의문은 런던을 떠난다 해도 종종 궁금해질 것 같다.
어쨌든, 이로써 떠나기 전 날엔 스콘과 빅토리아 스펀지를 왕창 먹고, 해물 찜을 먹으러 가는 여정이 확정됐다. 평상 시라면 비싸서 못 먹을 해물을 배가 터지게 먹고 런던을 떠날 것이다. 한낮에 센트럴 런던을 어그적 거리면서 맛있는 디저트 가게들을 섭렵하고 다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 가고 싶은 동네를 들러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그 정도면, 정말 런던을 떠나는구나라는 실감이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