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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Mar 07. 2023

한눈팔 여유 정도는 있어야지

이따금씩 몸이 무거우면서 기운이 없고, 머릿속은 공허한듯하면서도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가 있다. 며칠 연속으로 야근까지 하며 무리하게 일했을 때, 딱 그런 컨디션이 된다. 많은 이들은 이런 상태가 일정기간 동안 오래 지속되면 번아웃이라고 하는듯하다. 그 일정기간이란 게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2주든 3주든 일상생활에서 눈에 띄는 문제가 생길 정도가 되면 번아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즈음의 난 번아웃 초입에서 깔짝깔짝 컨디션 조절을 하며 정상상태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난 하나에 집중하는 걸 좋아했다. 살면서 딱 하나의 제대로 된 재능만 가지고 있어도 참 좋겠다고 늘 생각했을 만큼 여러 곳에 발을 걸치는 것보다 한 장소에서 하나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도 학창 시절에는 어디 한 곳에 빠져있어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냥 싱글태스킹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평범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부터는 일에 너무 푹 빠져 사는 것 같다고 자주 느낀다. 주변 동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솔직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무관심하다. 일에 한번 집중하면 중간에 제대로 쉬지도 않고 쭉 퇴근시간까지 일을 하곤 한다. 당연히 몸에 무리가 되겠지만, 요즘은 솔직히 정신적으로 무리가 돼서 그런지 쉽게 지치곤 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고, 난 원래 회사에 다니고 싶어 했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에 쉽게 재미를 느끼진 못한다. 그냥 어떠한 책임감과 불안감 때문에 일을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 같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나를 불편해하는 걸 요즘은 피부로 느낀다. 말도 잘 안 하는데, 말해봤자 일 얘기만 한다, 자기 사생활은 전혀 말하지 않는다 등등의 피드백을 요즘은 직접 면전에서 듣고 있다. 내가 일에만 빠져서 타인에게 폐쇄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느끼는 것 같다. 난 다른 사람들은 모를 줄 알았는데, 내가 은연중에 티를 내는 건지, 사람이라면 공감능력으로 그 정도는 다 알 수 있는 건지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는 걸 예전부터 마음으로 느끼고는 있었는데, 그게 진짜 사실이었나 보다. 피드백을 들었을 때 뭔가 씁쓸했다. 내가 어느 순간 일에만 빠져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은근히 슬프기도 했고, 예전보다 정도가 더 심해졌을 뿐, 나는 여전히 하나에 집중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기도 했다.


일에 빠져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등한시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것이 기분 좋고 행복한 일이라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안다. 지금 하는 일과 다니고 있는 회사가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원했던 거는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요즘 계속 기운이 없었나 보다. 가슴속에 무거운 돌이 하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숨 쉴 때마다 우울한 기분이 올라오기도 했었는데, 너무 일에만 빠져 살아서 그런 거구나 싶다.


요즘은 퇴근할 때마다 공허한 느낌이 든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일 말고 다른 집중거리를 찾아야 하는 게 분명하다. 사실 일 말고는 하고 있는 별다른 건 없다. 근데 웬만한 건 다 해봤는데. 주변에 친구들도 있고, 여행도 꽤 가봤다. 취미생활은 내 취향에 맞는 게 없어서 즐기는 게 없다. 몇 달 전부터 퇴근할 때마다 고민하곤 했다. 난 일 말고 즐길 게 뭐가 있을까? 


질리지 않고 즐기는 몇 안 되는 취미 중 분위기가 차분한 카페에 가는 취미가 있다. 예전엔 혼자 가는 것도 괜찮았는데, 요즘따라 혼자 가는 건 재미가 없다. 누군가와 같이 가는 게 좋은데, 친구들이랑은 예전부터 자주 가봐서 그런지 별로 끌리진 않는다.


생각해 보니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같이 보낸 게 참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관계나 적당한 관계의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혼자 놀곤 했지, 깊은 감정을 나누는 진중한 관계의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예전에 있긴 했었나 가물가물할 정도이다. 공허한 감정은 그래서 느끼는 것 아닐까 싶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아무도 없으니까. 누군가를 들여보낸 적도 거의 없으니까.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추억으로 먹고 산다는데, 난 아직 삶의 의지에 잔잔한 불을 피울 수 있을 만한 추억이 없는 것 같다. 


결핍을 채우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 인생의 묵을 대로 묵은 문제들은 사실 사랑으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직감적으로는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진실인 것 같다. 이제는 삶의 동반자 같은, 유사하더라도 하여튼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낼 누군가를 찾아야 할 때인 듯싶다. 그래야 내 인생에서 지금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일'이라는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하루하루 나를 짓누르는 무게감과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원하는 대로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의지 없이 그냥 생각이 흐르는 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조금의 반항을 해야겠다. 일에 대한 집착은 불안감 때문에 내 마음이 이끄는 방향이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곳으로 걸어갈 것이다. 가벼운 삶의 무게를 느끼면서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곳으로, 다음날과 그다음 날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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