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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Mar 12. 2023

3말 4초의 공기

매일 차를 끌고 출퇴근을 하는데, 늘 하천변을 지나간다. 나무들이 하천을 따라 줄줄이 서있고, 나는 그 옆에 나있는 도로를 따라가며 풍경을 즐기곤 한다. 매일 다니는 길이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느낄 수 있다. 나무에 꽃이 피었다가 잎이 자라고, 낙엽이 떨어지다가 결국 눈이 쌓인다. 1년이 지나 봄이 오면, 사계절 풍경이 머릿속에 간결하게 남는다. 작년 2월부터 하천변 도로를 따라 출퇴근했으니, 출퇴근한 지 대략 1년 정도 되었다. 일렬로 서있는 나무들의 변화가 이미지로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는 듯하다. 아마 이 이미지들은 평생 내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3월 중순이 되니, 하천변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기존 나무들을 하천 쪽으로 조금씩 옮겨 심은 부분이 생겼다. 그러면서 조금 넓어진 공간에 새로운 보도를 깔고, 여러 벤치를 설치한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앉아서 구경할 수 있게 거리 중간중간에 장소를 마련한 것으로 보였다. 시에서 행사를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우리 지역 사람들이 꽃을 보러 몰려드는 3월 말, 4월 초가 코앞이어서 그럴 것이다.


며칠 전, 우리 지역에 온 지 1년도 안 된 동료직원이 하천을 따라 벚꽃구경하기 좋냐고 나에게 물었다. 본인은 주말에 서울로 갈지, 지역 내에서 구경을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이곳이 연고지가 아니라면 굳이 여기서 벚꽃 구경을 즐길 필요가 있을까 속으로 생각했지만, 나름 괜찮다고 추천해 줬다. 의외로 사람이 많고,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하는 행사는 아니지만 구경할 만하다고 알려줬다. 3월 말, 4월 초가 절정이니까 그때 가라고, 다리 옆 공업고등학교 앞의 벚꽃나무들이 가장 이쁘니 그곳을 꼭 들리라고 얘기해 줬다.


딱 그때쯤, 3월 말~4월 초에는 평소엔 별로 없었던 하천변 거리가 사람들로 꽉 찬다. 연인들, 가족들이 활짝 핀 벚꽃을 보러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길게 모인다. 나무에 기대서 사진 찍는 연인, 솜사탕 먹는 아이, 꽃을 보며 뒷짐 지고 걷는 노부부. 다양한 지역주민들이 모여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작년 그맘때의 나는 차 사이에 갇혀 강제로 꽃구경을 했었다. 앞과 옆을 번갈아 보며 구경하는 건지, 같이 타고 온 사람 하차시켜 줘서 그런 건지, 앞에서 천천히 가는 차들 때문에 도로가 꽉 막혔다. 그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핀 벚꽃을 보며, 따뜻한 시절이 왔다는 걸 느꼈다. 해가 눈에 띄게 길어진 3월 말, 4월 초가 벌써 왔다는 걸 상기하면서.


평생을 지금 사는 지역에 살면서, 시내의 하천 근처로 벚꽃 구경을 자주 갔었다. 매년, 시간이 안되더라도 잠깐이라도 가서 구경을 했는데, 때로는 가족과, 때로는 친구와, 때로는 생판 모르는 남과 함께 간 적도 있었다. 매년 쌓아 올린 추억이 지금은 견고하면서 높지만, 어딘가 비어있는 듯하게 여전히 내 눈에는 허전해 보인다. 갈 때마다 내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같이 간 사람 사진 찍어주기, 나무에 핀 꽃을 보고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걷기. 매년 갈 때마다 거리의 공기는 사랑으로 가득 차서 따뜻했지만, 매번 나는 그 공기를 제대로 음미하진 못했다. 


3월이 되면 하천 변을 지나갈 때마다 어렸을 때부터의 추억이 떠오른다. 한 자릿수 나이 때 하얀 스타킹을 신고 나무 옆에서 찍은 사진이 떠오르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야자를 째고 벚꽃을 보며 거리를 걸어갔던 것도 떠오른다. 혼자 걸어가다가 가로등 불빛 아래 피어난 꽃을 사진에 담은 소소한 기억도 떠오른다. 평소에 꽃을 보기 어려운 몽골 유학생들을 위해 구경을 시켜준 것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과거를 돌아보다 보면, 참 다양한 추억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마냥 어린 사람은 이제 아니구나 싶어서 살짝 서글퍼지기도 한다.


사실 제일 서글픈 점은 매년 3월 말, 4월 초가 되면 그 일대가 사랑이 가득 찬 따뜻한 장소가 되는데, 나는 그걸 온전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곳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 만물을 모두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나는 매년 그때마다 그곳을 지나가는데도 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애써 무시한 건지, 몰라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공기는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차가웠다. 같이 걸을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었고, 그러자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같이 걸었으면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다가오는 사람을 내가 매번 내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튕겨내고 있었으니까. 늘 벽을 치며 혼자 있곤 했었으니까.


작년부터 자주 가는 동네 카페가 있다. 처음에는 커피와 디저트마다 입맛에 맞아서, 공간 디자인이 내 취향에 맞아서 자주 갔었다. 프랜차이즈 커피와는 다르게 산미가 강한 커피 맛이 매력인 곳이다. 노란색, 갈색 등 따뜻한 색감이 뚜렷한 인테리어도 좋았다. 회사는 삭막했지만, 그곳은 따뜻하고 차분했다. 조용한 내 성격과 잘 어울리는 편안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될 때마다 카페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거나 앉아서 마시곤 했었다.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은 찾아보면 지역 내에서 몇 군데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차분한 카페도 찾아보면 몇 군데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곳은 다른 곳과는 다른 강점을 가진 곳이었다. 다른 카페를 갈 때마다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머리로는 모르겠지만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차별적인 매력이 있는 카페여서 그럴 것이다.


사장님은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친절한 분이다. 방문 초기에는 그냥 친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비스 정신은 제대로 있다, 성격이 착한 사람인가 보다 정도로만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별다른 관심은 없었는데, 자주 보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점점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내가 쓸모가 딱히 없는 통찰력을 보유한 예민보스여서 그런지, 눈에 잘 안 보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장님만의 스타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맑으면서 상냥한 목소리, 메뉴에 대한 세심한 설명을 통해 마음 따뜻한 사람이란 걸 느꼈다. 밤마다 불을 켜놓고 일하는 모습을 보며 일에 미쳐있는 열정 있는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다. 따뜻한 색감의 인테리어, 군데군데 놓여있는 책들, 매일 틀어놓는 여러 잔잔한 음악들을 보니 감성적이고 마음 여린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정하게 정리정돈이 항상 되어있는 공간, 때로는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태도를 보며 깔끔한 사람이라 느꼈다. 그런 여러 느낌들이 모이니,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구나.


이 생각에 확신하게 된 건 사장님이 가끔 글을 쓰곤 하는 블로그를 우연히 찾았을 때였다. 블로그에 조심스레 적어놓은 글들을 보며,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참 여리면서 섬세한 사람이라 느꼈다. 그러면서도 도전의식이 있고,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다양한 재주를 가진 단단한 사람이기도 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면이 참 많다고 느꼈다. 그 점에 친밀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 참 힘들었었다. 가끔은 나 같은 사람은 별종 아닐까, 내가 살아가면서 내 주변에서 나 같은 사람을 평생 찾지 못하지는 않을까 무섭기도 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여러 친구를 사귀면서 내 마음을 온전히 뉘일 사람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와 다른 점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괜스레 거리를 두곤 했었다. 나처럼 상처로 얼룩진 사람이 아니구나, 여리지만 굳세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어서,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점점 근원적인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해소되지 않은 외로움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사는 곳 가까운 주변에서 그토록 찾던 사람을 결국 찾은 것만 같았다. 평소 모습과 본인이 적은 글을 떠올릴 때마다 나와 참 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곱씹게 되었다. 어느새부턴가 예전과는 다른 감정으로 카페를 방문하게 되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잘못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내 그대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도 강해졌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던 건지, 어느새 카페 안에서 안부를 묻는 정도의 관계는 되었다. 원래 내 성격은 궁금한 게 있어도 낯선 사람에게는 말을 잘 안 거는 편인데, 요즘은 적극적으로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한다. 혼자 내적인 친밀감이라도 쌓은 건지 싶다.


어느 순간 우연한 기회로 대화를 트게 되면서부터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대화를 하다가 중간중간 나온 말들과 티가 잘 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배려가 괜스레 마음에 남았다. 본인은 늘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닌다는 말에는 나처럼 외로운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이 느껴졌다. 메뉴를 갑자기 물어보면 당황하는 내 특징을 기억하고, 생각해 보고 결정한 뒤에 주문하라고 말하는 배려를 보며 세심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카페에 가서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점점 더 내 고민은 진지해졌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장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친해지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사실 조심스럽다. 이것도 사장님이 늘 했던 것처럼, 티가 잘 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친해지고 싶지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고 싶다.


블로그 글 중에서 벚꽃구경을 누군가와 같이 가고 싶다는 뉘앙스의 글이 있었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조심스레 그리고 조용히 전달되길 바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는 선에서 내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3말 4초의 따뜻한 공기가 그분에게도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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