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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May 25. 2023

감성을 잃고 회색이 된 그 후

어느덧 30을 코 앞에 둔 나이가 되었다. 어느덧 '대리' 직급을 달고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결혼 얘기를 조금씩 듣기도 한다. 학교를 다녔던 어렸을 때는 힘든 지금의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달고 살았다. 막상 빨리 지나가버린 미래의 내가 되어보니, 그때 그렇게 힘들지 않았으면 좀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기도 한다. 뭐 어쩔 수 없긴 하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아직 살 날은 요절하지 않는다면 많이 남아있으니까.


어렸을 때 나는 생각이 특이한 사람이었다고,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만나든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소울메이트라고 생각될 만큼 마음이 잘 맞았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대한민국 집단생활이 나와 참 안 맞는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으니까.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와 남들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늘 조금씩이라도 달랐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과 보통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관점도 늘 조금씩이라도 달랐다. 그래서 남들과 잘 섞이지 못했던 것 같다.


단적으로, 나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며, 엮여있는 많은 요소들을 최대한 많이 고려해봐야 한다는 마인드를 갖고 살았다. 인문학 책이든 위인전이든 격언이나 교훈 등으로 많이 알려져서, 많이들 나처럼 생각할 줄 알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고, 그렇게까지 신중하게 인생을 살지도 않았다. 항상 균형을 맞추며 살아야 하니까, 관련된 여러 요소들을 다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데,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거의 찾지 못했다. 다들 눈앞에 있는 이익과 자기 자신만을 돌보고 챙기기 바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얘기는 귀에서 자동반사 되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바람직한 가치관이라고 할 만한 것들, 균형, 다양성, 조화 등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던 나는 어느 순간 그 감각을 잃어버렸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내 가치관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여러 힘든 일을 이겨내며 깨지고, 다양한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며 박살이 나버렸다. 눈에 띄지 않게, 아침 안개가 해가 차오르며 자연스럽게 사라지듯이, 너무나도 조용하게, 나는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일을 할 때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직장동료든 용역사 직원이든 누구든 모두와 갈등을 만들지 않는 것을 1순위로 중요시했다. 업무적인 글이든 사적인 글이든 읽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오해를 만들지 않고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할까를 먼저 고민했다.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주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뒷전으로 밀어버렸다. 남에게 입맛을 맞추다 보니, 상식적인 선에서 행동하게 되고, 보통의 사람처럼 행동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나이가 든다는 게 이런 걸까 싶다. 나도 모르게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 것. 내 본래 모습을 잃고 회색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 참 슬픈 일이다. 모두가 타인이 기대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살아간다니, 아마도 개개인 모두가 불행할 것이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다고 본다. 자녀를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자녀를 사고로 잃어버려 슬퍼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어른들처럼 나도 내 감성을 잃어버린 채 회색이 되어버렸다.


요즘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읽는 취미가 생겼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취미가 있다고 얘기하기는 쑥스럽지만, 내밀해서 매력적인 취미이다. 내 또래 여러 블로거의 여러 글들을 읽다 보면, 다들 참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들 직장에서는 보통의 인간인 것처럼 행동하겠지만, 블로그에는 각자의 개성, 가치관, 감성이 다 들어있었다. 나 또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텐데, 다시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숨어있던 감성(갬성)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생각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좋은 친구를 둔 사람, 자신의 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으며 때로는 놀라기도 한다. 내 생각이 편협했음을 다시 한번 깨닫기도 하고.


내 본모습으로 다시 돌아와야, 내 감성을 다시 찾아와야, 매일 사무실 오후 4시쯤의 내 자리에서부터 침대에서 잠에 들기까지 느끼는 삶의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을 신경 쓰는 일에 절대다수를 투자했던 내가, 나의 마음과 생각도 같이 신경 쓰는, 균형 있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사람이 될 때까지 블로그 여행은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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