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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서 Apr 09. 2018

성장이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죄악이 필요했고 쾌락과 욕심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교사들에게 3년 매너리즘이란 말이 있습니다. 초반 각오가 무색하게 저에게도 당연한 듯 그 시간이 찾아왔었습니다. 대안학교이기에 1년에 며칠은 국토순례와 지리산 종주 등의 역할을 감당해야하고 국어과는 대외적인 행사도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저 지친 것이겠지요. 그러던 도중 저는 담임 역할에 부침도 생겼습니다. 젊음이라는 믿천으로 열정과 몸으로 때우는 시기가 초심을 잃고 끝나가는 겁니다.

그 3년차 매너리즘(?)이 시작되던 학기 초, 하루는 아이가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교우관계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선생님 오늘 저 상담해주실 수 있을까요?, 시간 되실 때 상담 부탁드려요.”
“그래, 오늘 5시쯤이 마치 시간이 비네 그때 교무실로 올래?”
“네, 5시에 올게요.”
하루 업무를 바쁘게 하다보니 머리에 퇴근 생각이 간절했는지 약속은 까맣게 잊고 퇴근해 버렸습니다.
‘카톡’
- 한성종 선생님 유진이가 상담이라고 찾아 왔는데 혹시 시간 잡으셨는지요.
저는 머리를 탁 쳤습니다. ‘아 어쩌지 완전히 잊었네.’
- 미안하다고 선생님이 내일 아침에 일찍 가서 이야기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그때 전해듣는 아이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렇게 저는 제대로 못살펴 준 것만 같은데, 5월 말쯤 아이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풍선으로 가득 채운 교실에서 편지를 한 상자 받아버렸지요. 그때의 미안함과 고마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제게 스승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이 저희에게 얼마를 챙겨주건 약속을 지키건 간에 선생님은 선생님이예요'라는 말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집에서 편지 한장 한장을 읽는데 다시 초심이 돌아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부터 사라졌지만요...... 어쨌든 저는 부족한 모습 바쁘면 바쁜 모습을 그대로 보이며 오히려 아이들과 더 나은 방법으로 소통을 찾아갔습니다.

<싯다르타>처럼 성장소설이라는 문학들은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를 놔둔 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만나는 순간 성장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맞는 이야깁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얼마나 바꾸느냐가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습 그대로를 만나야 한다는 거지요. 초심의 저도 바꾸기 어려운 마당에 있는 그대로 세상은 만날 수밖에 없더군요.
“새는 알에서 깨어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아브락사스는 힌두교의 신들 중 선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신입니다. 태어나려는 자는 자기의 틀을 깨고 선악이 함께 있는 ‘신’에게로 간다고 합니다. 교사는 그리고 어른은 혹은 부모는 아이들 앞에서 완벽한 ‘선’이 되려 애쓸 필요가 없구나. 오히려 그 약함과 강함, 선과 악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자기의 세계를 깨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싶습니다.
<자기앞의 생>에서도 하밀 할아버지는 말을 합니다.
: "세상에 완전히 희고 검은 것은 없단다 모모야. 흰 것은 그 안에 검은 것을 가지고 있고 검은 것은 그 안에 흰 것을 가지고 있지." 맞습니다. 저는 완전히 흴 수도 검을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3년차 매너리즘이란 것도 잘 되지 않음에도 완전히 희거나 검기 위해 노력하다가 만난 좌절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세계란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초심을 잃는 것은 당연하고 그때 스스로를 질책하기 보다는 위로가 더욱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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