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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롤 Dec 03. 2020

기록인의 '시간 기록' 예찬

기록하지 않는 시간은 사라지지만, 기록된 시간은 역사가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더 빠른 속도로 흐를 거야. 지금 고1 너희의 시간의 속도가 시속 17km라면, 고2, 고3은 18,19km로  30대에는 시속 30km로 한 해 한 해 갈수록 시간은 더 쏜살같이 흘러갈걸. “  


아직도 기억이 난다. 모의고사가 끝난 어느 날이었나. 수학선생님은 고1부터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며 나이와 시간의 속도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그 시절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를 20대, 30대가 되어서도 종종 곱씹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공감이 된다.


연말이 다가오면 아쉬워진다.

알록달록 물들었던 나뭇잎들이 쌀쌀한 바람에 떨어지기 시작하면 한 해가 가는구나 싶다. 시작의 설렘이 가득한 봄을 지나, 푸르고 뜨거운 여름을 지나면, 벌써 연말이 느껴지는 가을이라니.

계절을 생각하면 한 해가 절대적으로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올 한 해 무엇을 하였나?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장면 한두 가지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5년 전 여름엔? 3년 전 가을엔?

연애를 시작하였거나, 멀리 여행을 다녀왔거나, 이사를 했었던 커다란 사건은 기억이 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들은 흐릿하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은 마치 나의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한 주 그리고 하루가 빠르게 흘러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출근하여 분명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한 것 같은데, ‘할 일 목록’의 반도 못하고 퇴근시간이 되기 일쑤였다. 열심히 나는 무엇을 한 걸까? 나의 시간을 훔쳐가는 시간도둑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이 지키지 못할 계획을 세우고 과도하게 좌절한다. 24시간 무엇을 하였는지 30분 단위로 사후 기록을 해보아라"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보게 된 영상에서 한 학원 선생님이 수험생들에게 한 말이다.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여 매일 무언가를 계획하는 나에게 사후 기록은 신선한 발상이었다.


시간별로 ‘계획’이 아닌 ‘무엇을 했는지’를 적어보는 것. 시간 가계부를 쓰는 거네. 나의 시간을 무엇에 썼는지를 적는 거구나. 그때부터 나의 시간 기록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기록인생'은 시간 기록 전과 후로 나뉘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니라.’ 이 말을 빌려 사랑 대신에 기록을 넣고 싶다.


기록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니라


기록하니 보이기 시작했다. 업무 중 계획하지 않은 변수의 업무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 계획한 것과 실제 업무의 소요시간 차이 등. 그러니까 나는 지키지 못할 계획을 세워왔다는 것을.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할 수 없다.”는 피터 드러커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체득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이때 하는 말이구나.


일상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가족과  얼마의  시간을 보내고 있고, 혼자 만의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나의 시간 기록은 두 과정으로 이뤄진다. 시간을 기록하는 일, 그리고 이를 회고하는 일. 가계부를 단순히 쓰기만 하는 것으로는 지출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시간 기록은 회고를 필연적으로 동반해야 한다.


회고를 하며 내가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돌아본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시간을 채운 경험을 돌아본다. 업무를 돌아보며 기억해야 할 점을 기록하고, 읽었던 책에서 마음에 와 닿은 문장을 적어놓는다. 좋았던 일과 새롭게 알게 된 일을 기록한다. 회고하며 기록하다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새삼 깨닫는다.


기록하지 않은 시간은 사라지지만, 기록된 시간은 역사가 된다.


우연히 시작된 시간 기록은 2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 수년이 흐르더라도 수년 전의 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에 기뻐했고, 무엇에 힘이 빠졌었는지. 무엇에 열광을 하였고, 어떠한 경험과 생각을 하였었는지.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시간은 흐르고 순간은 되돌아오지 않지만 '기록'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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