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 씨는 싸가지가 없어 보입니다. 싸가지 있음을 증명해 보세요
[여의도 3년과 MBA] 매거진에서는 3년간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에서 겪었던 일들과 지금 준비하고 있는 MBA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보겠습니다.
Jay 씨가 다닌 대학교는 2년제예요 아니면 4년제예요?
XX증권 대졸 신입사원 채용 최종면접에서 내게 사장님이 던지셨던 첫 질문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하나는 '아니, 그래도 4년제 대졸 신입사원 채용 최종면접인데 질문 수준이 너무한 거 아닌가? 자기가 어떤 사람 면접하는지는 알고 들어와야지' 하는 거였고, 둘째는 반대로 '2년제 나왔더라도 학벌에 관계없이 면접만 잘 보면 뽑아주겠다는 건가? 신선한데?'라는 생각이었다. 아직도 실제 사장님 의도가 뭐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4년제 국립대학교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합격했으니 망정이지 떨어졌으면 대학교 인지도 탓하기 딱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도 사장님 질문이 완전히 생뚱맞은 건 아니었던 것이, 대한민국 여느 기업 사장님들 중에 내가 나온 대학교(울산과기원 - UNIST)를 아는 사람은 단언컨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을 거다. 당시 설립 6년 정도의 신생 국립대학이었던 데다 이른바 '공대'기 때문에 금융권에서 일하는 '문과' 사람들은 이름 한 번 들어보기도 힘든 대학인 게 현실이니까. 평생 처음 들어본 학교 학생을 뽑아줬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취업이란 게 일단 1승만 하면 되는 건데, 난 서류 다 광탈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면접에서 승리했으니 운도 좋았다.
아, 근데 저거보다 재밌었던 면접 질문도 있었다.
면접관: Jay 씨는 똑똑하고 일도 잘 할 것 같은데, 싸가지가 없어 보여요.
나: "저 싸가지 있습니다만..."
면접관: "제가 보기에는 없어 보여요. 면접 끝날 때까지 본인이 싸가지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세요."
나: (What the fxxk?)
당시 XX증권 리서치센터 대졸 신입사원 채용은 총 4번의 면접으로 이뤄져 있었다: 1차 실무진, 2차 또 실무진, 3차 인적성 평가 및 토론면접, 4차 대표 면접. (아니 무슨 내가 골드만삭스 들어가자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저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2차 실무진 면접에서 리서치센터 상무님한테 나온 거였다. 솔직히 정말 어이가 없었는데 당황하지는 않았다. 뭔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슨 직장인 드라마도 아니고 저건 어쩌자는 거지? 수준 떨어지는 상황극 같은데, 그럴듯하게 잘 play 해주면 점수 잘 받겠다 싶었다.
나: "박지성 선수가 축구 잘하는 걸 그라운드에서나 보여줄 수 있듯이, 저도 직접 같이 일을 해봐야 '싸가지 있음'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면접관: "말 돌리지 말고 싸가지 있다는 것만 확실히 보여주세요. 면접 끝날 때까지만 기회 드립니다. 다시 잘 생각해보세요."
나: (흠... 말장난으로는 안된다 이거지? 그럼 식상하지만 군대 얘길 할 수밖에 없겠는데? 어차피 모험이다)
군대 얘기는 좀 식상한 게 사실이라서 상대방 봐가면서 해야 되는데, 당시 센터장이셨던 상무님은 충분히 군대 얘기가 먹혀들어갈 type of 아재로 보였고(겉멋이 잔뜩 들어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매우 잘 먹혔다.
나: "상무님은 저를 뽑았다가 제가 싸가지없는 걸로 밝혀지면 어떻게 되나요? 잘리시나요? 아니죠. 저를 자르시고 다른 사람 다시 뽑으시면 되겠죠. 그럼 리스크가 매우 작은 겁니다. 근데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저희 부대장님은 훨씬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하고 저를 병사 대표로 임명하셨습니다. 당시 군대 자살도 큰 문제였고 탈영도 많아서 병사 대표 역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제가 후임들 잘 관리 못해서 사고 자칫 하나라도 터지면 부대장님은 옷 벗으셔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면접관: (...)
나: "다행히 저는 싸가지 있게 맡은 바 책임을 다했고 부대장님도 발 뻗고 편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자, 제가 이 면접장에서 '싸가지 있음'을 증명하긴 어렵지만 이만하면 리스크도 작은 것 같은데, 제가 싸가지 있다는 데 한 번 걸어보셔도 좋지 않을까요?"
면접관: "잘 알았다."
면접이 끝나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 상무님이 나를 보더니 "면접 잘 봤다. 면접은 그렇게 보는 거다" 하셨다. 그래서 비록 아직 2차 면접이었고, 두 번이나 이 짓을 더 해야 하는 걸 알았지만 내가 최종 합격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2015년 7월 1일 부로 XX증권사 리서치센터 채권팀에서 일하게 됐다. 여의도 3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