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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록 Nov 04. 2018

사라지고 살아지다

『백의 그림자』, 황정은


세운상가 진테크, 50년

내일 사라진다 해도 잘 모를 세운상가 564호 ‘진테크’. 이 오디오 수리점의 사장인 황종진 씨는 50년간 같은 자리에서 장사했습니다. 말이 쉬워 50년이지, 그 긴 세월 동안 한 곳에서 같은 일을 지속한다는 건 보통 의지와 애정이 아니라면 꿈도 꾸기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집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한번 길을 떠나왔더니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지경. 아마 그의 50년에는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역사가 서려 있을 겁니다.


미사일과 탱크, 인공위성 빼고 쇠로 만든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었다던 세운상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세운상가.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곳에는 서울 근대사의 몇몇 국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차갑고 무거운 콘크리트식 통로의 양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악기점, 전파상, 수리점들. 산업화 시절 공장에서 생산된 유니크한 공산품들이 한 곳에 진열된 만물상 같은 모습입니다. 용산에 새로운 전자상가가 생기기 전까지 세운상가는 서울의 만물상이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빈티지함 덕분에 국가지원을 받으며 유행에 민감한 힙스터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가 됐다고 합니다만. (‘세운상가’ 하면 저는 우선 유하 시인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이라는 시집이 떠오릅니다. 유 시인처럼 그 시절에 청년기를 보낸 일부 남성은 세운상가에서 19금 VHS 테이프를 많이 구했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유하 시인은 훗날 「말죽거리 잔혹사」, 「강남 1970」 등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세운상가 개관 당시 외관(왼쪽) / 건물 내부(오른쪽), 출처 : 위키백과

세운상가 진테크 이야기를 서두로 꺼낸 건 오늘 소개할 작품 때문입니다. 201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작가의 첫 장편이었습니다. 그해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죠. 벌써 알아차린 분도 계실 겁니다. 바로 황정은 소설가의 작품 百의 그림자입니다. 여느 소설처럼 이 작품도 제목이 독특합니다. ‘백의 그림자’라니요. 백 가지 그림자가 있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百이라는 이름을 지닌 등장인물의 그림자일까요. 읽어보면 의미를 알겠지만, 읽기 전에 유추해 보는 것도 소설 읽기의 재미입니다.



사랑 한마디 없는 연애


이 소설을 낸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랑을 말하는 독특한 연애소설! 이 작품을 해설한 유명 평론가는 말합니다.


‘이 소설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 소설은 우선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선량한 사람들의 그 선량함이 낳은 사랑이고 이제는 그 선량함을 지켜 나갈 희망이 될 사랑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가 되었다. _174쪽’


『百의 그림자』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이 평론가는 이렇게 해설을 시작합니다.


‘작년 가을에 한 문예지에 전재된 황정은의 첫 번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를 읽고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뭔가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의무감을 느꼈다. 행여나 있을 오독으로부터 이 소설을 지켜 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_173쪽’    


행여나 있을 오독으로부터 이 소설을 지켜야 한다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여기서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문학은 정독과 오독을 구분할 수 없다고 여기니까요. 어떤 시인의 표현을 빌려, ‘죽은’ 독해는 있을지언정 ‘잘못된’ 독해는 없습니다. 어쩌면 오독이야말로 작품을 더 풍성하게 가꿔 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여하간 평론가는 이 소설이 무척 좋았나 봅니다. 본인이 먼저 나서서 작품 해설을 달겠다고 출판사에 요청한 걸 보면요. (지금도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때 주례사 비평이 난무하던 한국문단의 풍경과 지금 이 평론가의 위상을 곱씹어 보면, 좋은 작품을 발견한 희열을 저런 식으로 과장한 게 아닐까 하고 저 혼자 생각합니다.


『百의 그림자』, 황정은


다시 소설 얘기로 돌아가죠. 출판사는 우선 남다른 연애소설로 마케팅한 것 같습니다. 책 소개를 읽어보면 단순한 로맨스라기보다는, 어떤 묵직한 사유를 담은 작품임이 느껴집니다. 더 유려한 문장으로 쓰인 평론가의 해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역시나 사랑 이야기가 가장 눈에 띄었나 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은교와 무재의 대화도 아름답고 따뜻합니다.




무재 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 것 같으니까요.

무재 씨가 소매로 풀 즙을 닦아 내고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 라고 너무도 고요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요.

네. _12쪽



지겹고도 찬란한 일상


연애소설로 읽어도 물론 좋습니다만, 평론가처럼 이 소설에 매료된 어떤 이들은 다른 차원으로 읽기도 합니다. 저 역시 연애소설로만이 아니라 그 안에 녹아든 깊이를 더 사랑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실제 세운상가를 모델로 한 ‘40년 된 전자상가’가 등장합니다. 이 소설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 스러져가는 전자상가에서 그제도 어제도 어쩌면 내일도 지겨울 만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 무재 씨와 나는 그 건물 속에서 만났다. 나는 여 씨 아저씨의 수리실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맡고 있었고 무재 씨는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_29쪽
수리실은 가, 나, 다, 라, 마, 다섯 개의 건물 중 나동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북쪽의 가동을 선두로 봤을 때 두 번째 건물이었다. 여러 달째 비어 있는 가게가 여덟 개 건너 하나씩이라 쇠락해 가는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지만 다섯 개의 건물 중 그나마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다. 일 년 내내 그늘져 어둑어둑한 주차 공간을 향하고 있는 일층에서는 난로나 선풍기나 라디오 같은 소형 가전을 팔았고, 이층부터 사층까지는 전자 기기에 사용되는 부품과 음향 기기와 빗자루며 대걸레 같은 생활용품을 파는 협소한 가게들이 장사가 될까 싶은 분위기로 어떻게든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수리실이 문을 열어 두고 있는 오층에서는 다른 층보다는 조금 폐쇄적인 분위기로 창고며 보석 감정원이며 무선 연구실이며 무엇을 연구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연구를 겸하며 도청을 하는 수상쩍은 사무실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_33~34쪽


이 소설에서 다이내믹한 서사는 없습니다. 전자상가에서 만난 은교와 무재라는 남녀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가 한 축, 상가에서 일하는 여러 인물의 잔잔한 일상을 그리는 이야기가 또 한 축입니다. 소설에서 그나마 다이내믹한 대목이라면, 재개발을 위해 상가를 철거한다는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고 나서부터죠. 소설 『百의 그림자』가 단순한 로맨스와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벽에 붙은 것이 있어 멍하니 읽어 보았다. 전자상가 철거에 관한 세입자 대책 회의라는 제목으로 일시와 장소가 공지되어 있었다. _60쪽





쓸모 있음과 쓸데없음


강한 것, 효율적인 것, 많이 찾는 것, 유행하는 것, 돈 되는 것, 쓸모 있는 것, 그래서 자신에게 도움 되는 것. 무엇이든 효용 가치로 판단하는 관점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 기민하게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효용을 따져야 하죠. 반면 도태되는 것, 배제되는 것, 약한 것, 비효율적인 것, 돈이 안 되는 것, 쓸데없는 것, 작고 시시한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사라지는 것, 사라져야 할 것. 효용, 효과, 효율 따위가 강조될 때 ‘사라지는 것’에 연민을 가지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차피 사라질 운명이니까요. 이제 환경이 변했다고, 자연도태라고 쉽게 말해버리면 되니까요.     


효용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 속 전자상가는 철거해야 마땅한 건물입니다. 이미 그 수명이 다했다고 봐도 무방하죠. 실제로 용산전자상가가 건립된 이후 세운상가도 쇠퇴했습니다. 강남 같은 매끈한 도심지를 떠올려 보면 세운상가는 초라하고 흉물스럽게 보이죠. (인터넷이 발달해서 이제 세운상가처럼 쇠락의 길을 뒤따르는 용산을 생각해 보면, 효용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만약 세운상가가 철거된다면 황종진 씨는 어떻게 될까요.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가게와 손님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황종진 씨의 50년은, 그 시간 동안 그가 이룩한 진테크의 세계는 결국 어떻게 되는 걸까요. 50년 동안 켜켜이 쌓인 시공을 앞에 두고, 이제 쓸모없으니 사라질 만하다고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걸까요.


여 씨 아저씨는 삼십 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서 음향 기기 수리를 하고 있었다. 기술에 비해 수리비는 저렴하게 받는 편이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답답하게 여겨질 만큼 느긋한 면이 있어서 까다롭거나 무례한 손님을 만나면 종종 다툼이 벌어졌다. 여 씨 아저씨는 그런 손님들의 물건 안쪽에 페인트로 조그만 표식을 해 두고 후에 그 손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든가 모르는 척을 하고 기계를 맡겨 오면 뚜껑을 따 놓고 페인트 자국을 확인하며 이 자식 이거 그때 그 자식, 이라며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_49~50쪽


이쯤에서 논리를 비약해 보죠. 효용의 관점을 동식물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찰스 다윈이라는 걸출한 과학자 덕분에 우리는 진화라는 개념을 터득했습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부연하자면, 다윈 전에도 진화론을 주장한 학자가 몇몇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근대 학문으로서 진화론을 확립한 사람은 찰스 다윈입니다.) 진화론의 주요 개념인 적자생존과 자연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 살아남는다. 어떻게 보면 으스스한 말입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식물은 죽는 게 당연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거칠게 표현했습니다만, 진화론에서 파생된 우생학을 나치가 악용한 사례를 떠올리면 그다지 이상한 시각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히 폭력인 거죠. _38쪽



하나로부터 여럿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의미


좋은 문학작품이란 무엇일까요. 문학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흔히 ‘좋은 문학은 여러 층위를 내포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같은 맥락을 두고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작품이 좋은 문학이라는 거죠.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몽』이 그런 지점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좋은 예입니다.) 이런 점에서 『百의 그림자』는 중층의 매력을 지닌 소설입니다. 언뜻 보면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인물의 감수성(평론가는 선량함이라고 표현한)으로 전자상가의 사라지는 것들을 조망합니다. ‘폭력적 세계에 짓눌린 개인들의 삶’이라고 누군가 유려하게 표현하듯, 철거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상가에 깃든 온갖 세계를 휩쓸어버리는 현대의 살풍경이 소설의 주 배경입니다. 흥미로운 건 그런 폭력적인 세계를 그리는데도 소설의 묘사나 서술이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百의 그림자』는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이면서도, ‘40년 된 전자상가’로 표상되는 ‘사라지는 것들’의 면모를 섬세하게 그린 사회소설이자 세태소설입니다. 이게 이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합니다.


여 씨 아저씨는 앰프를 내버려두고 박 씨 아저씨에게 가동의 철거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 가동에서는 벌써 몇 가지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듯했다. 사업자 등록증 없이 장사를 하던 세입자들에게도 이주비가 지급되고, 지금 한창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임시 상가로 들어갈 경우 한동안 관리비만 내며 장사할 수 있도록 조건이 제시되었다는 것이었다. 일견 괜찮은 조건인 것 같아도 임시 상가로 주어지는 건물이라는 것을 두고 상인들마저 거기가 어디냐고 궁금해하는 상황이라며 여 씨 아저씨는 회의적인 기색이었다. _85쪽

시대를 선도하는 유행은 TV나 인터넷 같은 첨단 미디어가 어련히 알아서 조명해 줍니다. 거기에 자본논리까지 합세하면 더 큰 영향과 위력을 발휘하죠. 누군가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도 –불쌍하게 여긴다는 것도 우스운 말입니다만- 유행은 시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그렇지 못합니다. 누군가 알아봐 주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게 그냥 사라질 뿐입니다. 물론 사라지는 것이 모두 옳거나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야 할 게 있는 것처럼, 때에 따라 사라질 것은 사라져야 합니다. 문제는 사라짐을 판단하는 과정, 그게 정말로 사라져야 할 것인가 따지는 절차가 이 세계에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사라지면 안 되는데도 효용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또 사라짐을 판단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요. 이렇게 보면 우리의 세계에는 사라짐을 제어할 수 있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셈입니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엔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 어느 날 전구를 사러 내려갔더니 노인도 선반도 없었다. / 텅 비어서, 어두운 벽만 남아 있었다. / 돌아가셨구나. / 하고 생각했다. _104~105쪽


첫 번째 건물의 철거가 결정되었다. / 월요일엔 준공식이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나 이따금 볼 수 있는 공무원들과 기자들이 왔다. 턱받이처럼 현수막을 두른 트럭들이 식장 측면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현수막은 굵게 꼬인 두 개의 밧줄로 트럭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앞뒤도 없이, 경축, 이라고만 적힌 것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략) 이튿날 출근하는 길에 신문 가판대에 들러 보니 한결같이 전자상가 철거, 역사 속으로, 라는 방향의 제목을 달고 있었다. _108쪽



사라짐이 여기 있었다


사라지는 것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으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엄연히 존재했는데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다행히 세운상가는 사람들의 관심 덕분에 아직도 살아남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이 세계의 수많은 것이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 갑니다. 그 사라짐에는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유족조차 없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라짐을 주관하는 기준은 오로지 쓸모 있음과 쓸데없음을 선별하는 효용의 관점뿐입니다.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일 수 있겠습니다만, 사라지는 것에 동정과 연민을 가지면 좀 어떻습니까. 맹자의 측은지심은 이럴 때 쓰는 개념이라고 저는 배웠습니다.





은교 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중략)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_112~115쪽



사족)

1. 이미 눈치채셨을 테죠. 세운상가 진테크 사장 황종진 씨는 바로 황정은 소설가의 아버지입니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황 작가가 가게에 나와서 카운터를 지키기도 했다네요. 그래서인지 황 작가의 작품에는 세운상가나 오디오 수리공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이런 배경까지 알고 보면 소설이 더 흥미롭습니다.


2. 『百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의미는 뭘까요. 소설에서는 ‘그림자가 일어섰다’는 식의 표현으로 등장인물들의 불안한 감정과 상황을 은유합니다. 작품을 읽은 어떤 이들은 百이 모든 사람의 ‘모두’를 뜻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저도 그 해석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3. 작가의 말을 덧붙이면서 오늘의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난폭한 세계를 살아가느라 고생하셨을 여러분께 소소한 휴식이 되었길 바랍니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

한다     

모두 건강하고

건강하길

     

2010년 6월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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