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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록 Nov 11. 2018

다름의 맨 앞에서

『세상에 없는 나의 집』, 금희


디아스포라,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


영등포 대림동에는 조선족이 많이 삽니다. 중국인도 허다하죠. 대림역 부근에는 중국어 간판으로 도배됐습니다. 2016년 기준 외국인 거주 비율이 전국에서 안산 단원구 다음으로 높은 대림동. 주변으로 공단과 유흥가가 많아서 그럴 겁니다. 저녁이면 대림역 부근에는 볼썽사나운 광경이 끊이지 않습니다. 대부분 연변 말투나 중국어를 쓰는 이들입니다. 조선족 주정꾼들이 내뿜는 도수 높은 중국술 냄새로 그득합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경찰차가 상주합니다. 조선족을 보는 대림동 토박이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습니다. 일부 경찰과 한국인 주민은 그들을 문제의 소지가 많은 요주 인물로 생각합니다. 동네 치안을 우려한다지만, 속으로는 그들 때문에 요동칠 집값과 지대를 걱정하죠.


영화 <황해>(왼쪽) / <범죄도시>(오른쪽)의 장면


여기가 한국인지 연변인지 헷갈릴 정도로, 먹으면 입 안이 얼얼해지는 마라탕처럼 대림동의 밤거리는 자극적이고 시끌벅적합니다. 무엇이 그리 사무치는지 조선족은 자주 격앙돼 있습니다. 조선족 주정꾼들에게 교양이나 품위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몇몇 흉악범죄 때문에 인신매매 루머까지 심심찮게 나돌 지경이니 토박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등포 대림동은 항상 우범지대로 손꼽힙니다. 터 잡고 잘 사는 조선족까지 싸잡아, 저급한 외국인 근로자들은 무조건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언론 기사에 따르면 실제로 조선족은 한국인보다 범죄율이 낮다고 합니다.)


조선족 1-2세대는 대부분 한국을 고국이라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성 역시 한국인이라 여기는 이가 많죠. 그런데 한국인 상당수는 그 사실이 마땅찮은가 봅니다. 한국이 고향일지언정 한국인은 아니라는 말로 조선족과 구분 지으려 하죠. 오히려 중국인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조선족은 과연 어느 나라 사람이어야 할까요. 물론 법적으로는 해당 거주지에 적을 둔 주민이겠지만, 비공식적(심리적)으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집단을 ‘디아스포라’ -또는 좀 다른 의미의 ‘노마드’- 라는 말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오늘 살펴볼 작품은 바로 한국의 디아스포라, 조선족 이야기를 다룬 금희 작가의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입니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 금희



“그러지 말고 준표는 한족 유치원으로 보내지 그래? 초등학교 입학할 때는 어떡하려고?” / 또래 한국애들보다는 한국말이 처지고, 동갑내기 중국 애들보다는 중국어 표현력이 부족한 준표를 놓고 내가 걱정하는 걸 지켜보더니, 남편이 한 소리 했다. _19쪽, 「세상에 없는 나의 집」


한국인보다는 한국어가 서툴고 중국인보다는 중국어가 부족한 조선족 아이들. 현재 조선족이 처한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합니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부분 정체성의 혼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중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될 수 없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그들은 악전고투합니다. 어느 삶이고 안 그렇겠냐마는, 조선족의 삶 역시 혼란스러운 정체성만큼 부침과 굴곡이 심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먼 타지에서 낯선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금희 작가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조선족도 대부분 조선어가 아닌 중국어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조선족 작가로 조선어 소설을 쓰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전 세계로 떠난 조선인 이민자 후손들처럼 조선족도 이제 완연히 현지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조금은 서글프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갔어요? 내는 내 배로 낳은 내 아새끼도 내삐리고 도망친 사람이라요. 더 말해 머하갔시요?" 이 말을 뱉고 나서야 비로소 여자는 눈에서 힘을 뺐다. 여자의 눈 안에서 맑은 액체 같은 것이 순간 조용히 솟구치려다 말았다. _86쪽, 「옥화」



이야기는 다름을 이해하는 도구


이야기하기는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 이유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평생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있는 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야기하지 않는 인간 사회는 없습니다. 만약 어딘가에 사람이 있는데 이야기가 없는 것 같다면, 그건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야기는 다름을 이해하는 최적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타인을 이해합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존재의 다름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회색지대들, 그 지대마다 완전히 그 지대에 속하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완전수 사이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무수한 소수들처럼.” _21쪽, 「세상에 없는 나의 집」


한국문단에서 조선족 문학을 제대로 다룬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해외동포문학 중 일부로 인식하고 연구했을 뿐이죠. (조선족 문학을 문예사적으로 디아스포라 문학에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만) 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조선족 문학은 생소합니다. 문예사조로 접하는 문학은 대부분 유럽, 영미, 일본 같은 강대국 출신 작가들 위주입니다. (한국문학을 제외하고) 문학수업에서 배우는 문예사조 자체가 유럽/영미문학을 뿌리로 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노벨문학상이나 세계적 베스트셀러쯤 돼야 주목하게 되죠. 문학 전공자들에게도 그러한데 일반 대중은 오죽할까요. 대부분 유명하고 잘 팔리는 작가/작품 위주로 관심을 두죠. 그래서 금희 작가의 작품이 무척 반갑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내력의 크기


“그렇게 따지고 보니 결국 다 같은 유목민일 뿐인 걸 괜스레 한탄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사람은 중국을, 중국 사람은 한국을, 한국 사람은 미국을 동경하듯이 어차피 좀 더 잘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다 같은 것이다.” _260쪽, 「노마드」


가만 보면 조선족은 내국인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주름살에 고생이 덕지덕지 묻은 중장년들은 그런대로 알 수 있는데, 좀 꾸미고 다니는 앳된 이들은 내국인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조선족이라고 명명하는 게 무색할 만큼요. 어쩔 때는 괜한 측은지심과 동정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잘못이라면 그저 변변찮던 나라의 혈통을 지녔다는 것뿐인데, 돼먹지 못한 나라 망한 뒤로 객지에서 대대로 생고생만 하다 그래도 고국이랍시고 돌아왔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골칫거리로 취급받는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그런 온정주의마저도 차별의 단서가 되겠습니다만.


디아스포라의 생리를 체화한 그들의 굴곡을 알량한 대림동 토박이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겪어 온 인류사적 궤적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얼마간의 오만일 겁니다. 그 오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금희 작가의 작품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한국인이 차별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비단 조선족만이 아닙니다. 지방 농촌이나 공장부지 근처에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어떻고요. 어떤 이는 모든 인간 사회에서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언뜻 맞는 말 같습니다. 인간은 한편으로 배타성의 동물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그게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다름에 대해 너무 배타적인 게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예전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나왔던 타일러 라쉬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차별이 늘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고 차별에 늘 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



멜팅팟 또는 다문화주의


서로 다른 것이 마구 부딪혀 불꽃을 일으킬 때 창조적 문화가 발현된다고 합니다. 미국을 생각해 보죠. ‘이민자의 나라’라고 불리듯 미국은 다인종/다문화가 기본입니다. 전 세계 온갖 민족과 인종이 모여 삽니다. 언뜻 생각하면 갈등과 충돌이 많아서 금방 무너질 것 같은데도 미국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강대국이자 패권국가입니다. 미국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연원을 다문화에서 찾는 학자도 있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예술가들이 당시의 세계적 대도시로 모여들었던 이유도 그러한 다양성 때문입니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다양성이 존중될수록 발전 가능성도 높아지죠. 물론 다름이 얽혀 있다 해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 역시 인종차별을 포함해 다민족/다인종 국가로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죠.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이른바 단일민족 단일국가라 일컬어지는 나라들에서도 비슷하게 겪는 문제입니다(단일민족 프레임도 엄밀히 말하면 비과학적인 용어입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 좀 흔들리긴 했지만,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굳건합니다. 몇 가지 문제를 겪는다 해서 국가의 기조를 고립주의로 수정하진 않을 겁니다.


(얘기가 옆길로 샜지만) 금희 작가의 소설로 한국문학의 외연이 좀 더 넓어졌습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다원주의/다문화주의입니다. 이야기가 다양할수록 이해와 공감의 폭이 넓어집니다. 더 많은 조선족 문학을, 나아가 한국어를 구사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한국에서 쉽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족)

1. 지금은 다른 곳에 살지만, 저는 영등포 대림동에서 꽤 오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족에 대한 위화감이 없는 편입니다. 겪어 보면 알지만, 조선족이나 한국인이나 사람은 똑같습니다. 조선족이라고 더 거칠거나 한국인이라고 더 교양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거친 환경에 살면 거칠어지는 것이고, 풍족한 환경에 살면 그만큼 여유로워집니다. 일일이 밝힐 수는 없지만, 제 가족사적으로도 조선족과 일부 연결돼 있습니다. 지금은 다문화 글로벌 시대이니 주변에 외국어 쓰는 이 서넛 있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닐 테죠(조금 서툴더라도 그들은 2개 국어를 사용하는 능력자입니다).


2. 생소한 지역의 문학을 읽으면 관점이 더 풍부해집니다. (예전에는 개발도상국들을 ‘제3세계’라 칭해서 ‘제3세계 문화/문학’이라 말하곤 했는데, 그 용어 역시 1-2세계 다음이라는 차별적 시선이 있다는 지적 때문에 요즘에는 잘 쓰지 않습니다.) 문예사조에 등장하는 몇몇 작가 덕분에 중남미 문학은 비교적 많이 알려졌습니다만, 아직도 우리에게 생소한 문학이 많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그만큼 강함과 권위에 기대어 협소하다는 말이겠죠. 조만간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지의 문학도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3. 몇 년 전부터 <황해>, <청년경찰>, <범죄도시> 같은 대중 상업영화에서 조선족 출신 조폭이 악역으로 곧잘 등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인 대중에게 조선족은 거칠고 어둡고 추레한 이미지로 각인됐죠. 파급력 강한 매체로 대중에게 잘못된 편견을 심어준 꼴입니다. 실제로 <청년경찰>이 개봉했을 때 조선족 단체에서 보이콧하기도 했죠. 최근에 <빅 포레스트>라는 드라마가 대림동을 배경으로 연출됐다고 하는데요.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나름대로 평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전 미디어와 다르게 악의적 편견 없이 대림동에 사는 조선족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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