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우리에게 교육을 시킬까
# 교육의 본질 –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
언어학자들의 눈에는 우리나라는 황당한 나라로 보일 것이다. 대략 100만 명 정도가 한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말은 2018년 7월 기준 Ethnologue 발표 기록에 따르면 7700만 명 정도가 사용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13번째이다. 즉 우리말은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절대 소멸할 일이 없는 언어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영어를 배우고 가르친다. 도대체 왜 세계 13등의 언어 대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언어학자들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순진하고 멍청한(?) 언어학자들과 달리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알고 있다. 세계의 흐름을 미국이 주도 하고 있고 미국을 중심으로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맞춰 영어를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갑자기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주도권을 중국이 잡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 더 극단적으로 외계인이 쳐들어와서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단언컨대 모든 대학에는 외계어 학과가 생길 것이며, 강남에 있는 수많은 토익학원들은 외계어 학원으로 탈바꿈 할 것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고 현주소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 모두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다큐에서 외국에 있는 세종학당에 대해 다루었다. 외국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아침부터 세종학당 수강신청을 위해 길게 줄을 선다. 학원의 사정상 한정된 인원만 선착순으로 수강신청을 받는데 이를 위해 기다리다가 자신 앞에서 마감되어 너무나 아쉬워하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똑같이 외국어를 배우는 상황인데 왜 누구는 억지로 해야만 하고, 누구는 못 배워서 안달이 나는 것일까.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국의 문화를 접하고 그것에 매력을 느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했다. 그 나라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아무리 번역이 된다 하더라도 그 나라의 언어가 갖는 고유한 뉘앙스까지 온전히 옮겨질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가는 길>을 번역한다고 했을 때, 과연 외국인이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에서 느껴지는 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리듬과 느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그들은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게 됨에 따라 더욱 온전히 그것에 빠져들고 싶었던 것이고 그를 위해 언어를 배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위의 세종학당과 달리 우리의 교육, 즉 학교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개인이 결코 선택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짜여진 내용을 일방적으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잊은 채, 교육의 목적을 개성의 발견, 자아실현 그리고 인격의 성숙과 같은 허울 좋은 말로 가리는 것은 교육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 교육의 목적 – 체제의 유지와 발전 그리고 재생산
교육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이고, 여기에는 막대한 돈이 투여된다.(작년 기준 약 71조). 과거에는 교육에 국가가 이렇게까지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과거 대부분의 교육은 사적으로 이루어졌고, 지금의 이런 대규모 공교육 시스템은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가는 이렇게까지 큰 돈을 부어가면서 교육을 하는 것일까. 교육을 복지의 하나로 볼 때, 노자의 이야기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므라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야만 한다.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 주어야만 한다. 제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높여야만 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먼저 반드시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미묘한 밝음’이라고 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 노자, 『도덕경』왕필본 36장
노자는 국가가 왜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여러 가지 기간 사업을 통해 국민들에게 혜택을 주는지 단순 명쾌하게 이야기한다. ‘빼앗으려고 한다면 먼저 반드시 주어야 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가 재분배를 하는 이유는 더 잘 수탈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국가가 세금만 걷고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게 없다면 반란이 일어나 국가는 붕괴될 것이다. 국가는 교묘하게 국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처럼 하여 오히려 더 많은 세금을 걷고자 하는 것이다. 화를 돋우려고 했던 필자의 의도와 달리 여러분은 이제 이런 말을 들어도 이제 화가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국가는 국민을 ‘개돼지’라고 표현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가 입장에서 ‘국민은 개돼지’라는 표현은 정말 적확한 표현이다. 닭에게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고 좋은 모이를 주는 이유는 더 많은 알을 낳게 하려는 주인의 술책이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복지는 더 원활한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함이고, 더 많은 아이를 낳게 하여 더 많은 세원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교육도 복지의 일환으로 보았을 때, 이와 마찬가지이다. 교육은 결국 그것을 실시하는 주체, 즉 국가의 이익과 체제 유지, 그리고 재생산을 위해 이루어진다. 이것을 좀 더 명료하게 보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멀리가면 조선시대까지 갈 수 있지만 가까운 일제강점기까지만 가도 이는 분명해진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다음 가장 열을 올렸던 것은 바로 일본어 교육이다. 조선인들은 이제 소위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식민지 노예에 불과한데, 왜 일제는 굳이 돈을 들여 학교를 짓고 조선인들에게 교육을 했을까. 조선인들의 계몽을 위해서? 인격적 성장과 자아실현을 위해서? 우리는 그 답을 모두 알고 있다. 일제가 조선인들을 교육시킨 이유는 ‘더 잘 부려먹기’ 위해서이다.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조선인을 부려먹으려면 말이 통해야했을 것이고 당연히 자신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보다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크게 달랐을까? 물론 양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백성들을 직접적으로 교육하지는 않았다. 배운다는 것은 어떤 힘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백성들은 멍청한 게 좋으니까. 글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삼강행실도 등과 같은 그림을 통해서 여러 가지 유교적 규범과 가치를 내면화 시켰다. 대표적으로 ‘효’나 ‘정절’ 등이 있다. ‘효’나 ‘정절’은 지금까지도 굉장히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정말 위험한 것이다. 이것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국가가 강조하고 교육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효나 정절’이 인간의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굳이 가르치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이것을 가르치고 강조했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유교국가로서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그것을 재생산 하는 것이다.
정말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의 교육이나 일제시대의 교육에서 국가의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는 분개 하면서도 지금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반감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난 이후의 교육도 이전의 일제 때의 교육과 그 목적은 같다. 초기 자본주의 국가의 시급한 임무는 대부분의 농민이었던 백성들을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노동자로 부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교육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국가가 나서서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교육을 시킨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이러한 임무는 새마을 운동과 함께 수행되었다. 새마을 운동의 핵심은 농지를 정리하고 농업을 기계화하여 농촌의 인구를 도시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농업이 기계화 되면서 농촌에 인력이 필요 없게 되자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고 이들은 구로 공단 등에 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속에서 이러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였고, 독재시절 아니었느냐고. 지금의 민주주의 시대와 그렇게 단순 비교할 수 있는 것이냐고.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일면 공감한다. 그러한 교육이 강행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일제와 독재라는 강력한 권력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억압과 권력기구인 국가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고, 민주적으로(?) 보이는 이 국가도 결국에는 모종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교육을 시킨다는 점에서는 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국가가 71조를 들여 교육을 시키는 목적은 무엇일까.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중요한 개정 배경 중의 하나는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에 대한 국가 ․사회적 요구이다. 2008년 11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범부처 차원에서 ‘국가 융합기술 발전 기본계획(2009 ~2013)’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이어 받아 미래창조과학부는 2014년 3월 국가 융합기술발전전략을 발표하면서 창의적 융합인재 양성을 융합기술 발전 전략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이는 미래사회가 융합기술이 주도하는 산업구조를 갖춘 사회가 될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 해설』
‘창의·융합적 인재 양성’은 최근 2015 교육과정이 나타나게 된 배경이다. 일단 ‘인재’라는 단어 자체도 불편하지만 ‘창의’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구토가 날 지경이다. 여기서 ‘창의’의 뜻은 절대 개개인이 자신의 독창적인 개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써 표현하는 그런 차원의 ‘창의’는 아니다. 교육과정에서 말하는 ‘창의’는 역시 미래 산업과 관련되어있다. 미래 산업구조가 융합기술과 창의적인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 아래 이러한 산업구조에 맞게 교육을 시키자는 발상이다. 결국 이 또한 노동자를 육성하여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 발전시키려 했던 초기의 공교육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미래사회가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면 그것을 미리 준비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움의 본질이 인격적 성숙과 자아실현에 있다는 관점의 교육관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교육을 이런 국가의 목적에 결부시키는 것이 굉장히 화가 난다. 그리고 다음에 다루겠지만 교육을 국가가 제도로써 독점함에 따라 ‘배움’이라는 것을 학교나 제도 속에 가뒀다는 점도 문제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그 의도대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배움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은 어떤 마주침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러나 국가는 교육을 철저하게 국가의 체제 유지와 발전에 종속시킴으로써 이러한 배움을 교육으로부터 분리시켰다.
#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울 자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배울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배울 것을 내가 선택하는 것을 사치처럼 여겨지게 하며 그런 건 취미로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웃기자 않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허락되는 소비의 자유마저도 교육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대학에 들어가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 대부분 자본이 원하는 것들을 배우도록 강요받는다. 자신의 과가 자본이 원하는 쪽이 아니라면 기꺼이 경영학과로 전과를 하고 안 되면 복수전공을 해서까지 그것을 배운다. 본인이 등록금을 내가면서까지 말이다. 슬픈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교육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