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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현재 Apr 19. 2020

눈은 항상 두번째다.

본다는 것의 의미

  남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질문이 하나 있다. 여자친구의 “자기야, 나 오늘 뭐 달라진거 없어?” 경험해본 남자들은 이 여자가 내게 또 왜 이러나 싶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은 곧 내 관심과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자 증명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요구된다. 그것은 마치 네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과 자연스럽고도 자상한 말투다. 물론 내 안에서는 진돗개가 발령되어, 샤워 중이었지만 맨몸으로라도 군장을 매고 포상으로 뛰어 올라가는 군인들처럼 치열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모든 세포들의 감각을 총동원해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찾는데 성공하면 세포들은 이제 안식을 얻는다. 발가벗은 몸으로 군장을 매고 뛰어올라갔던 군인도 이젠 멋쩍은 듯 웃음을 지어보이며 중요한 부분을 가리기에 바쁘다. 그래도 다행이다. 전쟁이 일어나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좀 씁쓸한 것이 하나 있다. 어릴 적에는 세상이 모두 나를 보는 것만 같았고, 그래서 이것저것 신경 쓰고 꾸미기 바빴다. 물론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환상 속에서 꽤나 즐거움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고 그런 환상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질 무렵, 잔인한 삶의 진실을 마주했다. ‘세계는 나를 보지 않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제발 좀 나를 내버려뒀으면, 날 좀 그만 봤으면 했는데, 이젠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 나 이렇게 멋지게 하고 왔으니 눈길 좀 주고 알아봐주면 좋으련만 상대방은 어김없이 딴 소리를 해댄다. 참 씁쓸한 일이다. 차라리 세계가 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어린 시절이 더 행복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니 나를 위해 눈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렇다. 세상은 나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세상에 갖는 관심보다는 항상 작기 마련이다. 그래서 반대로 누군가 내 달라진 모습을 알아차린다면, 그 사람은 내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좋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친구의 ‘나 어디 달라진거 없어?’라는 질문은 남자친구를 괴롭히려는게 아니라, 사실 나를 좀 봐주고 관심 가져줬으면 하는 예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까지도 필요 없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만은 나를 좀 봐줬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인 것이다. 얼마나 예쁜 마음인가. 그러니 좀 힘들더라도(?) 자세히 봐주자.


  우리는 모두 눈을 뜨고 있지만 사실 내 앞의 모든 것을 보진 않는다. 본다고 하더라도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마음이 가지 않는 것에는 눈을 뜨고 있더라도 사실상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옛말에 ‘마음이 콩밭에 가있다’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딴 곳에 있으면 눈앞에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내일 시험걱정에 온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이 지금 영화를 볼 수 있을까? 런닝타임 동안 성실하고 얌전히 영화관에 있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물을 눈으로 보지 않는다. 마음으로 본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결코 시력의 문제가 아니다. 시력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마음이 먼저 거기에 가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여자 친구는 이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묻는 것이다. 나에게 관심이 있고 마음이 있다면 분명히 보일 것이기에. 사실 이런 상황에서 진정으로 반성해야할 사람은 남자친구다. 지금 열렬히 사랑에 빠져있다면, 여자 친구의 이런 질문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랬다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여자 친구를 유심히 보았을 테고, 아니 더 정확하게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여자 친구만이 보였을 것이고, 물어보기 전에 이미 달라진 점을 알아차리고 말했을 것이다.


  이젠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누군가를 보는 행위는 곧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물리적이고 외적인 측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도 적용된다.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읽으려는 마음은 사랑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눈빛으로, 표정으로, 입꼬리로,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봐주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아이는 온몸으로 말하기 때문에 어른들은 속수무책으로 아이의 요구를 들어줄수밖에 없다.)


  우리는 구태여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내면을 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섬세하게 그 사람의 내면을 살피는 일은 꽤나 힘들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녀는 계속해서 상대방의 내면을 읽으려고 한다. 그래야 그것에 맞춰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친구 혹은 여자 친구가 오늘 어떤 일이 있었고, 마음에 어떤 옹이가 생겼는지 알아보는 눈은 사랑의 깊이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의 변화된 외모도, 마음의 상처도 보이는 법이니까.


  눈은 그래서 항상 두번째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마음이 가고, 거기에 따라 눈이 가는 거니까. 우리는 마음이 가지 않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상대방이 나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못 알아차리는 문제를 그 사람의 시력문제 혹은 둔감한 성격의 문제로 돌리지 말자. 그것은 슬프지만 내게 그만큼 관심과 사랑이 없다는 의미니까. 사실 ‘나 달라진거 뭐 없어?’라는 질문은 탄생 자체로 슬픈 운명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관심이 전제되어 있다면, 그런 질문은 존재자체가 불필요한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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