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원한현재 Apr 19. 2020

눈보다 코

 우리는 언제 사진을 찍게 될까. 사진은 책 속의 좋은 구절에 밑줄 긋는 것과 같이 기억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어떤 풍경을 보고 예를들어 활짝 핀 꽃을보고, 내 안에서 어떤 충만함이 느껴질 때 우리는 그것을 간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은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사진으로 남겨 그 충만함을 다시 한 번 복원시켜보고자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실패한다. 기억력 좋은 사진이지만 눈보다 많은 걸 담지는 못하니까.


  눈은 코보다 기억력이 나쁘다. 헤어지고 시간이 한참 지나면 그녀의 얼굴은 흐릿해진다. 그렇게 좋아했던 콧방울이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진마저 남겨놓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활짝 폈던 시간들 속 얼굴을 완전히 잊어버릴 뻔 했다. 이제 흐릿해져 사진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내 안에서 완전히 살아났다. 어떤 여인의 곁을 지나면서 익숙한 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정말 신기한건,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향기는 단번에 알아본다는 것이다. 코는 배신을 모른다.


  눈은 코보다 멀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를 볼 순 없지만 그녀의 향기는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은 항상 어떤 것과 거리를 두어야하기에 가까워지기 힘들다. 반면 코는 거리를 없애야 하므로 빨리 친밀해진다. 그래서 우린 꽃을 보면 눈으로 감상하기보다 자꾸 향기를 맡아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앉아 ‘보는 관계’에서 옆에 앉아 ‘맡는 관계’가 되는 것은 그만큼 친밀해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코는 가까워지길 바라고, 가까워야지만 기능하기에 언제나 눈보다 가깝다.



  그래서 눈보다 코를 더 신뢰한다. 코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으며 내밀한 관계를 증 명해주니까. 그녀가 눈에 예쁘게 보이는 것은 얼마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정말 좋은 향이 난다면, 과연 내가 그녀를 떠날 수나 있을까. 향긋한 삶을 원한다면 눈보다 코를 믿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보여지는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