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와 꿈
# 유토피아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
유토피아가 어떤 곳일지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같은 곳일까요. 막연하게 좋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곳인지 생각해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본주의적 쾌락에 중독된 우리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아마 이런 곳일 것 같습니다. 한도액이 무한인 카드가 모두에게 주어진 곳. 사치와 향락이 끊이질 않는 곳. 아무도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곳. 그런데 실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그리고 있는 이상향은 우리들의 상상과는 사뭇 다릅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노는 사람 없이 모두가 노동을 합니다. 물론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노동입니다. 하루 3시간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놀랍게도 학문을 탐구하거나 창작 활동을 합니다. 서로 모여 토론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을 향유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취미생활로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에너지를 쏟아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일의 강도로만 따지면,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들보다 더 강해보일 정도로 말이죠.
이들은 왜 여가시간을 이렇게 치열하게 보낼까요. 노동하고 남는 시간을 왜 여유롭고 안락하게 보내지 않는 걸까요. 여기서 우리의 ‘행복’에 대한 편견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노동하며 지내느라 ‘행복=쉼, 편안함’이라는 공식을 갖게 되었나 봅니다. 하지만 행복은 고강도의 몰입과 열정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주 희귀한 것입니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고되고 힘든 일이기도 하구요. 더운 날 집에 누워서 마시는 물은 결코 우리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합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간 설악산 정산에서 마시는 물 한 모금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은 감동과 쾌감을 주는 법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절대 안락하고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온 몸을 던져 무언가에 밀착되는 경험, 그렇게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고된 경험이 곧 행복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우리들의 소망, 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원하는 그것을 온전히 내 힘으로 해내는 경험, 그것이 결국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은 어떤 직업이 아닙니다. 어떤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삶의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꿈을 단순히 어떤 직업으로 한정시킨다면, 아무도 꿈꾸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꿈이 시시하다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것을 설레하면서 거기에 닿으려고 노력하겠습니까. 꿈은 그래서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 동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꿈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한비야 vs 황동규)
꿈꾸지 않는 자, 청춘을 포기했네 / 한비야
단 한 번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청춘,
단 한 번도 현실 밖의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 청춘,
그 청춘은 청춘도 아니다.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꿈이라도
가슴 가득 품고 설레어 보아야 청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눈부신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꿈이라는 것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청춘이나 열정과 결부되어 밝음과 희망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한비야씨의 ‘꿈꾸지 않는 자, 청춘을 포기했네’와 같은 시에서 말하는 꿈이 바로 이것이지요. 여기서 한비야씨는 꿈을 가지고 있어야 청춘이라 할 수 있고, 꿈을 갖는 것은 눈부신 젊음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많은 시간을 흘려보낸 사람으로서 젊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꿈을 아주 저주스럽게 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황동규의 ‘꿈, 견디기 힘든’이라는 시에서 꿈은 부담스러운 짐처럼 다가옵니다. 나를 불편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으로 말이지요. 황동규 시인은 꿈을 가진 사람이 짊어지게 될 삶의 무게를 이야기하며, 다소 침울한 분위기로 시를 전개해 나갑니다.
개인적으로는 황동규 시인의 입장에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꿈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예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글쓰기라는 꿈을 갖게 되면서 책을 읽는 게 힘들어졌습니다. 꿈을 갖기 전에는 정말 잘 쓴 글을 보게 되면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지만, 지금은 마음 한구석이 먹먹합니다. 기쁨이라는 감정보다 나도 이처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알랭드 보통의 책을 읽고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스물다섯 살 때 썼다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이미 스물다섯을 훌쩍 넘어버린 내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꿈’이라는 것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지금도 작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버겁습니다.
# 꿈, 견디기 힘든 내 삶의 전부
황동규 시인은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되뇌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나의 삶 즉, 꿈과는 멀어져가는 나의 삶에서 느끼는 자괴감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꿈꿔왔던 삶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한탄과 회한이 반드시 불행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직 내가 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꿈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꿈꾸는 것을 철없는 행동,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회한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 시에서 ‘신분증’은 직업이나 생계를 의미합니다. 더 쉽게 번역하면 학생증이나 사원증이 되겠네요. 어느 명문 대학의 이름이 적힌 잠바를 입고 다니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어느 대기업 사원증을 자랑스럽게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구요. 사실 그런 것들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게 거의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전부인 양 내걸고 다닙니다.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그럴까 싶어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황동규 시인의 말처럼 신분증에는 내가 온전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나란 사람이 어떤 색깔과 향기를 가진 사람인지, 어떤 걸 꿈꾸고 소망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전혀 담기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반대로 학벌이나 직업을 상징하는 ‘신분증’에 갇혀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황동규 시인은 ‘꿈’은 견디기 힘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릴적 우리들의 꿈을 떠올려 봅시다. 대통령, 탐험가, 과학자, 예술가 이런 거창한 것들 아니었나요.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꿈은 어떻습니까.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어디든 취업만 됐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꿈은 우리에게 자꾸 이것을 해내라고, 나 자신과 싸워 이기라고, 나를 극복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을 견디기가 힘듭니다. 꿈에게 화해를 요청하지만, 꿈은 화해를 모릅니다. 계속해서 나를 벼랑으로 밀어 부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꿈과 결별하거나, 꿈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것으로 축소시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황동규 시인은 마치 ‘꿈’의 대변자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꿈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작게 만들다가 결국 포기해버리면, ‘삶의 전부’를 포기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빛을 보셨나요. 아니, 지금 내 모습을 한 번 거울에 비춰볼까요. 어떻습니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무언가에 몰입해 온 몸을 던지는 사람의 얼굴입니까. 아니면, 흘러가는 세월에 내 몸을 맡긴 채 시체처럼 끌려가는 회색빛 얼굴입니까. 황동규 시인의 말마따나 꿈을 포기한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저버린 것이고, 살아도 살아 있는게 아닌 삶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 기다리는 꿈은 결코 꿈이 아니야
어떤 것을 소망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꿈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입버릇처럼 세계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심히 그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세계여행을 진짜로 준비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진짜로 돈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백일몽으로만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세계 여행 가고 싶다’라는 말은 ‘아, 너무 힘들어. 벗어나고 싶어’로 읽어야 합니다. 아마 이들에게는 꼭 세계여행이 아니어도 상관없을 겁니다. 지금의 불행을 덮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백일몽은 ‘꿈’이 아닙니다. 내 현실을 잊고 가리려는 그런 썬그라스일 뿐, 간절히 소망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석진씨의 ‘꿈’이라는 시에 ‘기다리는 꿈은 결코 꿈이 아니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꿈이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지금의 현실을 바꾸게끔 끊임없이 강제합니다. 그래서 나는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꿈’이 아니라 ‘백일몽’입니다. 좋은 글을 발견하고 좌절감을 맛보면서도 ‘그래, 오늘 글 한 편 쓰고 잔다!’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작가 지망생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진짜 꿈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꿈이라는 렌즈로 투과된 세계가 나를 압박해 들어오니까요. 꿈을 버리지 않는 한, 그 꿈을 향해 한 발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상주의자가 곧 현실주의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꿈과 이상을 가진 사람만이 그것에 비춰진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이 말은 ‘모순’이 아니라 ‘진실’이 됩니다. 세계여행을 진짜로 꿈꾸는 사람만이 부족한 자신의 경제적 현실을 직시하고 돈을 모읍니다. 백일몽으로 꿈꾸는 사람은 돈을 모으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가리기 위해 세계여행이라는 꿈을 꾸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백일몽을 꾸는 사람은 오히려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진짜 꿈을 가진 사람만이 현실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정적인 현실을 개선시키려고 뭔가를 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뭔가 꿈을 가지고 계신게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더 나은 삶의 모습을 꿈꾸고 계신거겠죠.
# 맺는 말
어른이 된다는 것 그리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슬프게도 점차 꿈을 줄여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된 현실에 지쳐 혹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현실의 벽에 굴복하여 꿈을 줄여가는 것이겠죠. 하지만 꿈을 완전히 없애고 그것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박한 꿈이지만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면서 정말 조금씩이라도 그것을 위해 뭔가를 꼼지락거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꿈이 있나요? 만약 유토피아에 여러분이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