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 이야기해보고 싶은 주제는 문학, 그 중에서도 시입니다. 물론 문학 이론이나 창작에 대해 전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깜냥도 안되구요. 아마추어의 수준에서, 어쩌면 중고등학생 수준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될 겁니다. 중고등학생 수준이라고 자존심 상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또한 중고등학교 수준에서 요구하는 아마추어로서의 독자와 필자일 뿐이니까요. 프로와 달리 아마추어는 그것을 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됩니다. 물론 진입장벽이 조금 있어서 그것을 넘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중고등학교 문학교육을 잘 받으셨다면 충분할 거라고 믿습니다.(물론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만)
# 우리는 언제 시를 쓰게 될까?
우리는 언제 사진을 찍게 될까요. 길을 가다가 너무 예쁜 꽃을 발견하거나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나왔을 때일 겁니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에 우리는 사진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평소 보기 힘든 광경이거나, 나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귀여운 것 혹은 지금 찍어두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릴 어떤 소중한 대상에 우리는 사진기를 가져갑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낀 그것을 사진에 담아 남겨두고 싶은 것이죠. 물론 사진 한 장에 내가 느낀 것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기에 항상 아쉽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의 감격을 간직하고 싶어서 우리는 사진을 찍습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특별한 감정, 느낌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펜을 꺼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느꼈던 것들과 완전히 다른,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그 무엇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것을 포착해 언어로 남겨두려는 것이죠.
‘사랑’이라는 단어처럼 의미가 모호한 단어는 없을 겁니다. 60억명의 사람이 있다면, 아마 사랑의 의미도 60억개가 될 겁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그 의미는 각기 너무나 다른 셈이죠. 우리는 두 번째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꺼려집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연인에게 이미 ‘사랑해’라는 말을 썼는데, 지금 이 감정과 느낌은 그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만났던 친구와의 사랑은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사랑은 미친 듯이 휘몰아쳐 정신을 못 차리게 합니다.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또 똑같이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 두 느낌을 구별할 말을 찾지 못하고 결국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사랑해’라고 두 번째 연인에게 말합니다.
선천적으로 의지박약의 체질을 타고난 우리와 달리 끈질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든 두 사랑의 차이를 구별하고, 다른 지점을 포착해내려고 합니다. 끈질기게 파고들어 간 결과 결국 그 둘을 구별하는 언어를 창조해냅니다. 그렇게 시가 완성됩니다. 아마 이 시인은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거나, 비유를 사용해야만 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사랑의 경우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운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마시멜로 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겟죠. 두 번째 사랑의 경우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같은 사랑’이라는 비유를 사용해 앞의 사랑과 구별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시를 읽을 때 직유법, 은유법 이런 것들을 분석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직유를 써볼까?, 다음엔 환유를 써봐야겠군’ 하면서 쓰는 시인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느낀 고유하고 특별한 느낌을 어떻게든 그것에 근접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느낌들과 구별되게 표현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 과정에서 은유도 쓰고 직유도 쓰는 것일 뿐이지, 수사법 자체가 시의 어떤 조건이 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유에서 시가 쓰이기도 합니다.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시를 쓰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특별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모두가 ‘사랑해’라고 쓰니까 화가 나는 겁니다. 자신들의 사랑은 저 속물들의 탐욕스러운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아주 고귀하고 숭고한 것인데, 저들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우리랑 똑같이 쓰니까 화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들만의 특별한 사랑의 감정과 느낌을 표현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사랑의 느낌을 잡아 언어화해 낸다면 운율이나 다른 기타 등등 시의 요소가 없더라도 그건 훌륭한 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 됩니다. 연애편지를 쓰면서 말이죠.
# 시가 쓰여지는 순간 - 단독성과 언어의 한계
위의 이야기를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단독적으로 느낄 때,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낼 언어가 없을 때 시를 쓰게 됩니다.’ 단독성이란 절대적으로 다른 특성,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속성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특별하고 고유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러한 단독적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독적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적 한계를 느끼게 합니다. 나만 느끼는 그런 특별한 감정과 느낌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언어로는 그것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이죠.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지금 내 온몸에서 요동치는 이 느낌을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거겠죠. 그렇게 우리는 언어적 한계를 느끼고 뭔가 지금의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어를 깎고 창조해내는 것이죠.
단독성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까요. 사랑하는 애인은 단독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것이죠. 사람들이 헤어진 친구에게 종종 이렇게 위로하는 것을 듣습니다. “세상에 여자는 많아. 너무 슬퍼하지마.” 그런데 과연 이 말을 듣고 그 친구는 위로가 될까요. 사랑하는 연인과 결별해본 사람은 이것이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세상에 여자는 많지만,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죠. 즉, 내가 사랑했던 그 여자는 내게 대체 불가능한 단독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위로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녀를 잊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만나보지만 그때마다 전에 만났던 그녀가 정말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니까요.
단독성은 문학적 감수성과도 연결됩니다. 세계를 얼마만큼 단독적으로 인식하느냐가 그 사람의 감수성을 얘기해줍니다. 매년 벚꽃이 피면 꽃구경을 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안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가는 사람들은 왜 안갈까요? 작년에 핀 벚꽃이나 올해 핀 벚꽃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봤는데 뭐 하러 또 보러 가냐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작년에 핀 벚꽃과 올해 핀 벚꽃은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올해의 벚꽃은 내년의 벚꽃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사실 똑같아 보이는 세계는 무한히 다른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 내 이마를 스치는 바람도 아까 스친 바람과는 다른 바람입니다. 세계를 다르게 그리고 고유하게 느끼는 감수성, 그것이 바로 문학적 감수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이런 것들이 얼마만큼 있는가, 그것이 내 감수성의 폭과 깊이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 생활은 단조로워.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모두 비슷하고 사람들도 모두 비슷비슷해.그래서 난 좀 지루해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히 밝아질거야.
그렇게 되면 난 네 발걸음 소리와 다른 발자국 소리를 구별하게 될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는 나를 땅 밑으로 숨게 할 테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 <어린왕자>, 생택쥐페리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어린왕자>에서도 이런 단독성에 대한 인식이 드러납니다. 위에서 ‘길들인다’는 표현의 의미는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관계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듬뿍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강아지에게 ‘길들여짐’이 곧 ‘사랑’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애정의 대상이 되면 그 대상은 단독적인 존재가 되고, 다른 존재들과 구별됩니다. 위에서 다른 모든 발자국 소리와 너의 발자국 소리가 구별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만약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내 발자국 소리가 어떻게 다른데?”라고 물어봤다면 여우는 아마 적절한 표현을 창조해내려고 애쓰는 시인처럼 머리를 싸매고 그것을 표현해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를 느끼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에 성공했다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구요. 이처럼 어떤 존재가 애정의 대상이 되면 대체 불가능한 단독적인 대상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을 지시하는 표현을 찾아내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도 ‘꽃’에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찾아 불러 달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 존재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언어를 창조해 내는 것이 바로 ‘시’인 것입니다.
# 시를 읽는다는 것 - 느낌의 세계를 복원하는 일
앞에서 우리는 시가 언제 쓰여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언어를 거칠고 투박하게 사용하는 버릇 때문에 시인이 못됩니다. 어쩌면 단독적인 존재가 내게 없을 수도 있구요. 적어도 이게 있다면 언어를 좀 더 정밀하게 쓰려고 노력했겠죠. 다른 것들과 구별해야 하니까요. 이처럼 아마추어로서 문학을 즐기는 것에 있어서 직접 글을 써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 특히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이성복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가 시를 왜 읽어야 하고, 시를 통해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정’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너의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이성복 시인은 문학을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앞서 말했던 단독성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우리의 일상적 세계는 ‘사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느낌’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혹시 첫 발령 났을 때 기억나나요? 그때의 느낌을 한 번 떠올려 봅시다. 그 설렘과 떨림,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내 모든 감각이 쭈뼛쭈뼛 서 있는 듯했던 그 불안과 ‘위험’의 상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복 시인이 얘기한 ‘느낌’과 ‘위험’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적응의 동물답게 곧 적응을 합니다. 그래서 2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직장은 내게 아무런 떨림을 주지 못합니다. 일상적 세계, 즉 ‘사실’과 ‘안정’의 세계에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 되어버린 겁니다.
문학을 읽는 것은 우리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를 읽는 일은 세계에 처음 내던져졌을 때, 온몸에서 꿈틀거렸던 그 ‘느낌’을 다시 복원하는 일입니다. 출산하여 그 쪼그마한 녀석을 처음 봤을 때, 어머니의 느낌은 어땠을까요. 아마 10시간의 산통쯤은 이미 잊어버렸을 만큼의 황홀과 감격의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런 느낌은 점점 흐릿해져 가고, 아이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처럼 즉, ‘사실’과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어머니가 첫 아이를 만났을 때의 감동과 경이감을 노래한 시를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바로 그때의 ‘느낌’이 복원될 겁니다. 고된 현실을 살아가면서 잊고 있었던 그 찬란했던 ‘느낌’과 ‘감정’을 다시 찾는 것이죠.
이처럼 시는 우리가 모두 느꼈었지만, 이제 ‘사실’이 되어버린 삶의 파편들을 복원해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는 ‘느낌’과 ‘위험’ 속에서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느낌’의 세계는 이성복 시인이 얘기하듯 ‘위험’하기도 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매일같이 설레고 떨리는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물론 행복은 하겠지만, 일상생활은 불가능할 겁니다. 열정적인 사랑이 요구하는 에너지는 한 존재를 피폐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니까요. 우리는 이 ‘불안’과 ‘위험’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빨리 친숙하고 ‘안전’한 세계로 건너가고자 합니다. 많은 커플들이 하루 빨리 서로 편안한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겠죠. 그런데 그렇게 편안하고 안전한 세계로 건너가는 것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사랑’이라는 ‘느낌’과 ‘감정’을 죽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사랑의 ‘느낌’과 ‘감정’을 유지시킬 수 있을지,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 우리가 시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모든 시는 불온하고 불온해야만 합니다. 일상생활에 묻혀 둔감해졌던 우리의 불안하고 위험한 ‘느낌’의 세계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 ‘시’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느낌을 유지한 채로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정’으로 끊임없이 이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사실’과 ‘안정’의 세계로 건너가 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느낌과 감정들을 죽인 채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불편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힘이 들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 ‘느낌’의 세계를 복원하고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삶을 풍요롭게 그리고 후회 없이 잘 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되살려내야 하는 이유는 사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집을 한 번 돌아볼까요. 어느 순간부터 집은 친숙하고 익숙한 ‘사실’과 ‘안정’의 세계가 되어있습니다. 매일같이 보는 부모님은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가구’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없으면 찾게 되지만, 있으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가구처럼 우리는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늘 어머니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혹시 오늘 우울하고 외로우신 건 아닌지, 우리는 어머니의 내면을 읽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가족은 일상생활에 포섭되어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매일 ‘느끼고’ 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슬픔을 노래한 시를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가구였던 부모님이 살아 움직이는 한 인간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느낌과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말입니다. 그렇게 시를 읽고 내 느낌과 감정을 복원한 날은 적어도 어머니 손을 한 번 더 잡게 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어릴 때처럼 함께 거실에서 이불 깔고 자자고 해볼 수도 있겠죠.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좀 더 잘 보낼 수 있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조금은 덜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덜 후회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를 읽고 감정과 느낌을 복원해야만 합니다.
# 시가 어려운 이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감정을 살려내 삶을 살아있는 채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시를 읽어야 합니다. 모든 삶의 부분들은 우리에게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실’이 되어 내게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들은 점점 ‘느낌’보다 ‘사실’이 되어 갑니다. 그렇게 ‘사실’의 세계가 ‘느낌’의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게 되면, 시체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시를 통해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삶을 살아있는 채로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시를 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느낌’과 ‘감정’이 주는 불편함과 불안을 끌고가야 하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지만 시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는 추상적이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라서 어려운 겁니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특별한 나만의 경험을 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마땅치 않을 때 시를 쓰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인데 내가 느낀 나만의 느낌을 표현할 때 시가 됩니다. 그래서 시는 시인이 시를 쓸 당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시인의 마음 상태에 들어가 보아야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는지 우리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시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표현론적 관점’에서는 작가의 전기를 분석해 그의 삶을 분석하고 이해해야만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매번 시인의 전기를 조사하고, 시를 쓸 당시의 배경을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에 묘사된 상황을 통해 감정이입을 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일급의 독자는 이런 감정이입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경우에만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경험한 경우겠지요. 우리가 사랑을 진짜 제대로 직면해서 바닥까지 경험했다면, 아마 사랑을 노래한 시들이 읽히고, 그때의 감정도 금방 복원될 겁니다. 하지만 사랑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중학생이 사랑 시를 읽고 그것을 제대로 느끼긴 어려울 겁니다. 물론 내용을 파악하고 요점을 정리해볼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반면 일급의 독자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독자입니다. 물론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되기까지 굉장히 많은 작품을 경험해야하고 훈련도 필요하겠죠.
우리가 시를 잘 읽고 시를 통해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복원하여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래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삶에서 여러 가지들을 경험할 때, 제대로 직면하는 것. 관광객처럼 삶을 구경하듯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던지듯이 살아가는 것, 그리고 스스로 시인의 내면으로 육박해 들어가 시인이 표현해내고자 했던 그 느낌과 감정들을 어떻게든 포착하려는 노력.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급의 독자가 되어 이제 시를 잘 느끼게 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삶과 밀착되어 있는 시
앞에서 한 시에 대한 이야기를 돌이켜보니, 우려스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훈련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자칫하면 시를 우리의 삶과는 먼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지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문학은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이 사실은 ‘은유’로 되어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언어 자체가 ‘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문학시간에 배우는 수사법들은 너무나 표면적이고 단편적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A는 B다’라는 형식을 따를 때 이것을 은유라고 하고, ‘~처럼, ~같이, ~인양’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직유라고 배웁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에서의 문학성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어떤 언허학자는 우리의 모든 말이 환유와 은유로 구성되어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이 사실은 ‘시’라는 뜻입니다. 과연 무슨 뜻일까요. 차근차근 살펴봅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A는 B다’와 같은 표면적인 형식은 사실 은유의 본질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은유는 어떤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다른 그 무엇에 빗대어 이해하는 관점이나 해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실 우리는 굉장히 훌륭한 은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고 표현할 때, 사랑은 ‘호수’처럼 이해됩니다. 이것은 길을 가다가 물웅덩이에 빠지듯이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그런 수동성을 내포합니다. 또한 큐피트가 내게 화살을 쏴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는 그런 신적인 경험처럼 사랑을 이해할 때, 이러한 표현이 쓰입니다. 반면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었어’라는 표현에서 사랑은 주고받을 수 있는 어던 사물처럼 이해됩니다. 여기에서 사랑은 굉장히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은유는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존재론적으로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해석체계가 곧 은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만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이 사랑을 어떻게 그리고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겁니다.
주변에 말을 잘한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봅시다. 그들은 언어의 마술사들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은유를 자유자재로 그리고 다채롭게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 독특한 관점에서 대상을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은유를 사용합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시는 잘 읽으면 하나의 은유로 시 안의 모든 표현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은 하나의 은유를 통해 파생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가지고 시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인 겁니다.
# 마무리하며
인간의 시간은 질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강렬한 열정과 몰입으로 활짝 꽃피우는 시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꽃이 지고 시커먼 나뭇가지만 남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보내는 시간입니다. 벚꽃이 피는 2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는 쓸쓸한 나뭇가지로 보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껌껌한 시간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 나무는 벚꽃이 찬란하게 피는 그 2주 때문에 벚꽃나무라고 불립니다. 일 년으로 따지면 5%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나무를 벚꽃나무로 부르고 기억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80평생 그 긴 시간을 살아가는 이유도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로 인해 통통 튀었던 그 시간 때문이 아닐까요. 내 온 감감과 느낌, 감정이 살아 요동치던 그 시간들이요.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시간들 때문에 무료한 이 ‘사실’과 ‘안정’으로서의 세계인 일상을 버텨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학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꽃피웠던 시간, 그때의 ‘느낌’과 ‘감정’을 되살려 다시금 꽃피우는 것 같은 경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시를, 소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를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은 곧 살아있어도 죽은 나뭇가지처럼 삶을 보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시를 잊은 그대여, 다시 한 번 꽃을 피울 용기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