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성 Aug 08. 2023

일물일어설: 지독한 완벽주의?

크리에이터가 지독한 완벽주의를 대하는 태도

2년 전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퀴즈에 출연해서 한줄평의 탄생 비화를 밝히는 과정에서 프랑스 작가였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 '기생충'의 한줄평을 작성할 때 왜 다소 생경하고 이지적인 '명징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회상하면서 그 자리에는 '명확하다'라는 조금 더 쉬운 표현 대신 명징하다는 표현이 수사학적인 맛을 살리고, 장소를 뜻하는 '위아래'보다는 움직임, 즉 벡터의 의미가 녹아 있는 '상승'과 '하강'이라는 표현이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https://youtu.be/8XKBduGyYrE


구글에 찾아보니 이동진 평론가가 인용한 일물일어설에 해당하는 문장의 영문 번역은 다음과 같다. 


“Whatever the thing you wish to say, there is but one word to express it, but one verb to give it movement, but one adjective to qualify it; you must seek until you find this noun, this verb, this adjective.”


단 하나의 명사, 동사, 형용사가 있다는 단언과 함께, 작가 (넓은 의미로는 창작자나 크리에이터라고 확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가 이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는 제언도 담고 있다. 


이 문장을 읽고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지독한 완벽주의를 축약한 문장이라는 생각이었다. 연구자도 결국 자신의 연구 성과를 글 혹은 다른 매체로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작가의 아이덴티티와 직업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이렇게 철저한 완벽주의 강조는 따끔한 충고를 넘어서 매서운 회초리, 혹은 강렬한 트라우마를 불러오는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었던 호통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그다음 생각은 이 문장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일종의 사고 유희였다. 만약에 이 말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작가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명사, 동사, 형용사 찾기에 실패한다면, 독자는 다른 메시지를 전달받게 될 텐데, 만약에 그 메시지가 원래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보다 더 좋다면? 혹은 'The thing you wish to say'가 모순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모순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풀어 설명하는 것이 매우 구질구질한 일이 된다면? 나는 문학 전공자도, 언어학자도 아니라서 이런 질문에 전문가들이 어떻게 답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이런 순간들이 있음은 알고 있다.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창작자가 작품을 남기는 순간 해석은 수용자의 몫이 되어 버린다. 이는 서양 고전 중에서도 고전인 '파이드로스' 등에서 이미 등장했던 생각이다. 그리고, 메시지의 복잡성, 혹은 창작자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는 점 역시 낯선 주장은 아니다. 의미를 숨길 수도 있고, 무의식의 발로로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숨겨진 메시지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다음 이어지는 생각은, 다소 절망적인 것인데, 내가 연구자로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 (영어)로 소통하며 일물일어설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완벽주의를 구현할 수 있겠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다. 아카데믹 라이팅은 모국어와 상관없이 새롭게 배워야 할 스킬이라고는 하지만, 이 훈련이 모국어 화자가 가지고 있는 수준의 감각과 자신감을 길러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부 아카데믹 라이팅 지침서는, 영어가 워낙 다양한 언어적 배경을 가진 독자들이 의미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이는 언어이기 때문에 일물일어설에서 풍길법한 꼰대스러운 완벽주의는 오히려 초심자들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아마 자연과학과 응용과학에서는 반드시 정확하게 써야 하는 단어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이런 비판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과학은 이미 '발견의 맥락 (context of discovery)' 보다 '정당화의 맥락 (context of justification)'에 너무 힘을 주고 있고 (오로지 나의 주관적 판단이다), 이 과정은 수사학적인 매력 없이는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힘을 준 문장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꾸준히 노력해서 닿을 수 있는 능력의 상한선이 어디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일물일어설 류의 잣대 앞에서는 한없이 부족한 기록을 계속 뱉어낼 것 같은 우울한 예감이 든다. 


글을 쓰면서 마지막으로 정리한 생각은, 일물일어설에서 강조하는 것이 결과보다는 완벽한 표현 도구를 찾기 위한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만약 찾지 못하면 난 펜을 꺾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플로베르는 '그럼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는 마'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아마 가장 낙관적이고, 평범한 창작자가 절망감에 빠지지 않고 노력하게 만드는 유일한 해석이라는 생각도 든다. 


박사 과정을 하면서 생기는 여러 정신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내용의 글이나 강연에서는 항상 완벽주의를 경계하라고 한다. 하지만 다수의 '박사 후보생'들이 완벽주의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그들에게 완벽, 혹은 선을 알 수 없는 개선을 요구하는 평가자들이 존재하고, 실패해도 괜찮지 않은, 능력주의와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지극히 불안정한 학계의 노동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고, 본인이 박사과정을 희망할 정도로 똑똑하다면, 완벽주의에 잡아 먹힐 정도로 어리석어서도, 그렇다고 너무 현실을 낙관해서도 곤란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언제나 불안정할 준비가 된 사람의 마음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는 이런 표현을 나에게 남기는 메모의 형식을 통해서라도 곱씹는 까닭은 어쩌면 완벽주의에 잡아먹히지 않고 동거하는 외줄 타기에 지친 내가 마음을 다잡기 위함일 것이다. 균형을 잃고 위태로워질지도 모를 미래의 내가 이 메모를 보고 다시 감각을 찾으면 좋겠다. 


커버 이미지: 노을이 예쁘게 드리운 집 앞 (스톡홀름, 스웨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