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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성 Sep 29. 2024

포닥 지원 연대기: 들어가며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마주한 진로 선택의 기로 


2019년 말과 2020년 초, 석사 학위 과정을 마무리할 때 나는 진로에 대한 뒤늦은 고민을 마치고 박사 과정에 지원하기로 결심했었다. 그때는 다소 준비가 늦었고, 준비가 늦었기 때문에 몇몇 기회를 시도하지도 못하고 놓쳤다. 당시에 혹시라도 박사 과정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학계에 남고자 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말자고 다짐했었다.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서 박사 과정의 끝이 다가왔다. 아직까지는 연구를 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좀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학계는 연예계만큼이나 지독한 압정 사회라서, 박사를 졸업한 사람 중 오직 극소수만이 정년을 보장받는 정규직 지식노동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내 커리어의 끝은 대학 교수가 교수가 아닌 다른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 학계를 떠나든, 떠나기 전까지는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그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래서 9월에 스웨덴에서는 final seminar (스웨덴어로는 slutseminarium)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학과 내부의 논문 초고 심사 과정이 끝난 후 나는 본격적으로 박사 후과정 (이하 포닥)과 펠로십 포지션 지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많은 박사 졸업생들은 학계에 머물지 않고 공공기관이나 (특히 스웨덴인 박사들의 경우 자국의 공공기관에서 스웨덴어로 업무를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그중 절반 정도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시 학계로 돌아왔다. 정규직이 보장되고, 실질 근무 시간도 적은 공공기관을 마다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생활이 잘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회사를 선택하기도 했고, 그런 선택을 후회하는 사람과 너무나 만족하는 사람이 반반 정도인 것 같다. 포닥을 하다가 회사로 가는 사람들도 있고, 박사 졸업 즉시 학계가 아닌 곳으로 취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선택지 중에서는 연구를 더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인 것 같다. 일단 아직까지는 더 이상 연구활동을 하는 것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회의감이나 연구는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벽을 마주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 벽을 만날 때까지 좀 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스웨덴어 구사 능력이 좋지 못하고, 유럽 연합 소속국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EU 국제기구에 취직하거나 스웨덴 내의 공공기관에 취직하는 데 있어 딱히 메리트가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내 비교우위는 지금으로서는 학계에 있다.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다들 공감하는 이야기이겠지만, 공학이나 자연과학 박사들에 비해 사회과학 박사들은 합리적인 연봉을 받고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관련 분야 졸업생 중에서 경제적 풍요를 위해 학계를 떠났으며, 그 선택에 만족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스스로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들이다. 


같은 조건, 달라진 조건, 그리고 나아진 조건


4년 전에는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바라건대 마지막 학위 과정이기를 바라는 박사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2020년 초반과 지금 내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곳에는 아무리 봐도 내 자리가 없는 것 같고, 이곳에 남아야겠다는 강한 애정이나 절박함도 딱히 없다. 내가 다음 과정을 시작할 곳이 어디가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황이다. 지난번과의 가장 큰 차이라면, 지난 4년 동안 박사과정생 대부분이 그렇듯 학회, 워크숍, 방문 연구 등을 가면서 다른 곳의 사정이 어떤지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과, 지금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는 것은 그다지 때늦은 준비가 아니라서 좀 더 마음의 여유를 두고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또 있다면, 이제는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으면서 지원 서류를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성형 AI에게 지원 서류 작성을 맡기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 생성형 AI는 합격 수준의 서류를 써내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쓴 서류 초안의 부족한 점을 잡아내거나,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한 경우에 보통 어떤 전개를 따라가야 하는지 등의 조언을 해준다. 맞춤법 검사라든지, 좀 더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주는 역할, 혹은 너무 분량이 많은 경우 어떤 부분이 불필요한지 예시를 들어가며 내용 압축을 도와주는 기능도 쓸만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는 생성형 AI를 지원 서류 작성이나 문의 이메일을 보내는데 활용하고 있고, 앞으로도 활용한 경험을 틈틈이 공유할 예정이다.


또 달라진 점은 아무래도 선택의 무게이다. 물론 석사 과정까지 하는 것은 대단한 학문적 성취이자 엄청난 시간과 경제적 비용의 투자였지만, 박사 과정을 하면서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기회비용에 비하면 약과이다. 석사를 끝낸 다음에 진로 고민을 하고 방황하는 것보다는 박사를 끝낸 다음에 방황하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박사 졸업 후 방황하는 시간은 학계에 남는 데 엄청난 불리함으로 다가온다. 학계에서는 박사 졸업 그 순간부터 'academic age'라는 암묵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다양한 기회를 제한한다. 쉽게 말해서 펀딩이나 포닥 지원 기준을 박사 졸업 후 3년이나 5년 이내 등으로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행은 조교수 채용이나 연구 교수 채용 등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는 학계에서 매해 쏟아져 나오는 신규 박사들의 공급을 소화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든 일종의 경쟁 제한이며 차별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신규 박사들에게는 이런 제한이 도움이 된다. 아무리 뛰어난 연구자라고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박사 졸업 후 5년이나 7년 동안 연구 활동을 했던 사람과 논문이나 연구 실적에서 싸워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카데믹 나이'의 적용은 그래서 주니어들에게는 다소 득이 되고, 본인이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나이가 들면 바로 족쇄로 변하는 양날의 검이다. 


둘째 이유는 역시 박사 과정에 투자한 시간과 기회비용 때문인데, 이것이 매몰비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박사 졸업 후에 경력 단절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회사에서도 반기지 않는다. 소수 뛰어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박사를 마치면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인데 (그것도 중간에 근로 경험이 거의 없는 경우), 신입 사원으로 생각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나이이고, 경력직으로 우대하기에는 사기업에서 요구하는 인재상과 박사 과정에서 훈련받은 내용이 다소 달라서 이를 어떻게 생각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안 그래도 박사 졸업생의 '이용가치'를 가늠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경력 단절을 겪은 경우라면 더 신뢰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이런 지원자는 아무리 학력이 높아도 미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페둘라 (David S. Pedulla)의 표현을 빌리자면 'B급 지원자'이다. 최종 면접 후보에 오르지 못하고 이력서가 파쇄기로 들어가는 그룹이라는 뜻이다. 


이민청 너도? 


이런 내 상황에서 또 하나의 변수는 2021년 개정된 이민법이다. 내가 박사를 시작했던 2020년 9월 기준으로는, 박사 졸업과 거의 동시에 스웨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어서, 버틸 수 있다면 이곳에서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에서의 구직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2021년 이후 바뀐 법으로는 졸업과 동시에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미래에 내가 고용될 것이라는 증거가 필요하다. 도입 초기에는 정규직 채용 혹은 2년 이상의 계약직 채용이 조건이었고, 비유럽권 국가에서 온 박사과정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자 최소 기준이 12개월까지로 줄었으나, 이민청이 내 서류를 심사하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12개월이기 때문에 사실상 1년 반 정도의 계약서를 들고 가야 안심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스웨덴에서의 구직 활동은, 중경삼림에 나온 파인애플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있다. 그 유통 기한은 보수적으로 잡자면 2025년 7월 말이다. 7월 22일은 스톡홀름대학교에서의 내 고용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고, 나의 박사과정 거주허가증은 이에 따라 7월 말 정도에 만료될 예정이다. 내가 12개월의 구직 활동을 위해서 거주허가증 연장 신청을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위해서 제출해야 하는 통장 잔고 금액이 적지 않고, 만약 내년 7월까지 이곳에서 직업을 구하지 못할 경우 나의 미래가 이곳에 있기는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 구직 연장은 하지 않고 배수진을 치기로 마음을 먹은 상황이다. 


아직 10개월이 남았기 때문에 촉박한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학과에서 다른 연구 프로젝트 서포트도 하고, 티칭도 하고, 학생회 일과 행정 일도 하면서 '벌었던' 시간 덕분에 원래 계약 기간인 4년에 10개월을 추가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이지, 누군가가 나에게 선심 쓰듯 준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나  10개월 가까운 계약 연장의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제도는  매우 불합리하며, 아주 효과적으로 스웨덴에서 세금으로 키운 박사과정 학생들을 내쫓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이 제도에 대해서는 내 진로가 확정되는 날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하나 더 쓸 생각이다. 그전에는 내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해당 제도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Hic Rhodus, hic salta)!


복잡한 조건 속에서 다시 내 가치를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증명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나의 진로에 대해 사람들이 물어보면 내면의 불확실함 때문에, 또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이 정치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의 글을 쓸 생각이다. 쉽게 말해서 스웨덴에 대한 애정이 강한, 때로는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스웨덴에 정착하는 것이 나의 옵션이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것을 고려하는 것처럼 포장해야 했던 경우를 의미한다) 대답을 흐렸지만,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고, 거창한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고 보여주어야 할 시간이다. 


5년 전에 박사 과정 지원 연대기를 쓸 때에도 결과를 모른 채 연재를 시작했지만 결국은 끝을 봤고, 쓰는 동안에 내 머릿속을 정리하고, 때로는 나의 꼬여갔던 상황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위안도 받았던 것처럼, 이번 나의 여정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박사과정에 지원하는 사람보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사람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이 글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을 분들은 훨씬 적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재미를 섞어가며 글을 쓸 테니 독자들에게 읽을 가치가 있는 기록으로 남았으면 한다. 


사진: 연구실 창문 너머로 바라본 안개 자욱한 스톡홀름 프레스카티 캠퍼스. 사회학과가 2033년부터 C 빌딩 4층과 5층으로 이사 간다고 하니 아마 8층과 9층에서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것 역시 뒷방 늙은이들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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