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시간 25
둘째 초2 은율이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바로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네 살 많은 누나는 동생과 티브이를 볼 때 짜증을 많이 냅니다. KBS2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연모'를 보는데 티브이 앞에서 동생의 질문 비가 후두둑 내렸습니다.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연모’는 남녀 쌍둥이로 태어나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던 아이가 왕세자인 쌍둥이 오빠가 죽으면서 남장을 하고 왕세자로서 살게 됩니다. 배우 박은빈이 왕세자 역을 맡아 은율이가 볼 때는 여자인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둘째는 왜 여자가 남자처럼 옷을 입었는지, 왜 계속 남자 흉내를 내는지, 뻔히 여자인 게 보이는데 사람들은 왜 몰라보는지, 이것저것 묻다가 결국 "좀 조용히 하고 보란 말이야!" 누나의 무서운 경고를 듣고서야 멈추었습니다.
저는 은율이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질문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질문을 한다는 건 뭔가를 알고자 하는 배움의 언어잖아요. 그런데 둘째의 질문 습관이 언제 사라질지 걱정도 됩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봐도 학년이 오를수록 수업에서 질문 수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의 질문 횟수가 적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한번은 다른 학교에서 하브루타 강의를 한 적이 있었어요. '세상에 바보 같은 질문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학년이 오를수록 질문이 줄어드는 게 자연스러운 걸까?" 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다음은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메모한 것을 제가 재구성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질문하기가 귀찮아요. 질문하면 왠지 창피해요. 수업 중에 질문하라고요? 진도를 늦추면 큰일 나요. '왜?'라는 질문이 생겨도 참아요. 이해하지 못해도 아는 체해야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잖아요. 모른다고 하면 지식수준이 드러나거든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다시 설명해 주세요'라는 말들은 꺼낼 수 없어요. 그렇게 하면 수업 흐름이 끊겨요. 선생님과 친구들의 시선이 뻔하죠. 수업이 끝날 즈음에 질문을 하는 건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공공의 적이 돼요.
학교에선 질문하면 비웃음만 들어요. 용기 내어 어렵게 질문했는데 지금은 질문하지 말라고 거부당한 적도 있어요. 사실 질문을 어느 타이밍에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또 문제가 뭔지 아세요? 질문 계속하다가는 자칫하면 나댄다거나 잘난 척한다고 찍혀요. 모르는 게 생겨도 가만히 있는 게 나아요. 별 문제는 없어요. 인터넷 검색하면 되니까요. 고민하고 생각하는 자체도 싫어요. 알고 싶거나 궁금하지도 않아요.
당연히 집에서도 질문을 하지 않아요. 대화 자체가 없거든요. 어른들이 말하면 듣기만 하면 돼요. 질문하면 대든다고 혼나고, 토 단다고 핀잔 듣고, 말꼬투리 잡는다고 한소리 듣습니다. 어른이 말씀하는데 사사건건 말대꾸냐 하세요. 잔소리만 길어져 더 피곤해요. 그런데도 왜 질문을 안 하냐고요?
한 아이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아이가 가정과 학교에서 질문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대략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아이들의 질문력이 어느 정도 살아있는데 초5 정도만 돼도 질문하는 언어를 잃어버리는 친구들이 생깁니다. '질문하면 안 되는'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이죠. 몰라서 물었는데 쉬운 것조차 모른다며 비웃음 받는 상황, 질문하는 게 귀찮고 창피한 마음, 수업 진도를 멈추어야 한다는 두려움, 질문 한 번 잘못했다가 친구들과 선생님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일, 질문했다가 말대꾸하는 예의 없다고 혼난 경험 등 질문과 관련된 부정적인 기억이 쌓였을 것입니다. 한 아이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을 감수하거나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질문하는 힘'은 질문을 평소에 자주 해야 자라기 마련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질문하는 힘이란,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르는 것이 생길 때 망설임 없이 물어보는 마음의 힘입니다. 저는 하브루타 교사지만 누군가에게 물어보기 전에 마음속으로 "현승아, 용기 좀 내 봐. 충분히 할 수 있어. 판단받지 않을 거야. 모르는 것이 생기면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거 아냐? 괜찮아, 네가 던지는 질문은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는 것일 거야." 하면서 스스로 격려합니다. 추상미 감독의 다큐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학교 선생님들과 단체 관람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날 추상미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다고 들어서 질문 몇 개를 적어 두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추상미 감독이 무대에 나타나면서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 떨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추상미 감독의 인터뷰가 끝나고 질문을 해도 좋다는 멘트가 나오자마자 힘없이 팔을 눈높이 정도로만 들었습니다. 용기가 생겨서 든 게 아닙니다. 너무 떨려 머뭇거리다가 질문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아 손부터 든 것이죠. 사회가가 어설픈 모습으로 손을 든 저를 발견했습니다. 두세 문장밖에 안 되는 질문인데도 마치 2시간 연설하듯 벌벌 떨었습니다. 평소 아이들에게 질문을 용기 있게 해 보자고 강조하는 교사지만 제가 직접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하려 하니 '아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은 달랐습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걸 힘들어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질문을 잘 못하는 원인일 수 있지만 보다 힘이 센 원인은 질문과 관련된 안 좋은 기억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에 질문을 했다가 조롱받고, 혼나고, 판단받은 경험이 튀어나와 내면 검열자 역할을 합니다. 하브루타 방식으로 2014년부터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지만, 일주일에 세네 차례 수업만으로 용기 있게 질문하는 힘이 자라기는 힘듭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아이가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생각하는 힘을 키우도록 돕지만 한 이아가 자신감 있게 질문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를 만납니다. 모르는 것이 생길 때 편하게 질문할 수 있는 힘이 성장하길 바란다면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의 주체는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이에요. 한 아이의 질문력은 아이를 둘러싼 일상 공간의 분위기에 따라 성장의 유무와 정도가 결정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질문해도 괜찮아. 세상에 바보 같은 질문은 없어."라고 자주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리고 말씀해 주신 대로 아이들이 질문하면 "우와, 정말 좋은 질문인데..." 하면서 격려해 주세요. 끝으로 아이들의 질문을 끝까지 경청해 주세요. 제가 이어서 "답을 아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세요."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보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답변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질문을 멈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질문이 사라진 이유에는 어른들의 눈빛과 말투, 판단하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질문을 할 때 말대꾸한다고 혼내지 말아 주세요. 아이들의 말투가 곱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의 바른 고운 말투로 마음을 전하면 좋겠지만 어른들도 이게 어렵잖아요.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우리 가정이 "질문해도 괜찮아!" 문화인지 먼저 살펴 주세요. 질문해도 괜찮지 않은데 질문을 하라고 하면 아이들은 마음에 병이 듭니다. 질문해도 괜찮지 않은 문화에서 질문을 하면 비웃음을 듣거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아이로 혼이 납니다.
아이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며 넘어가지 않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했을 때, 너는 그것도 모르냐, 여태까지 뭐 듣고 있었냐,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냐, 왜 이렇게 말귀가 어둡냐고 하지 말아 주세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아이들은 아는 체, 괜찮은 척하며 넘어갑니다. 아이의 질문은 여러 종류의 두려움을 뚫고 용기 내어 나아가는 아이의 발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