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애스터로이드 시티>
이 글은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 속 한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직도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
배우는 연극 도중 자신이 맡은 배역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는다. 그러자 배우는 무대를 벗어나 이유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답은 없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그럼에도 자신이 연기를 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배우의 말을 조금 바꿔 자주 생각한다. 아직도 이 세상이 이해가 안 돼. 그것은 성인이 된 내가 세상과 마주하면서 생긴 일종의 투정이자 두려움이었다. 여전히 이 세상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인 세상. 누군가에게는 불운한 사고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이, 뜻하지 않은 죽음이 찾아온다. 심지어 그 세상을 사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다반사다. 그런 점에서 현실 세상은 이상한 세계,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닮았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존재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영화 속 가상의 도시지만, 더 나아가면 현실을 비유적으로 본뜬 세상이다. 다만, 우아한 웨스 앤더슨 씨의 예쁜 색감과 뚱한 유머가 첨가되었을 뿐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도시 외곽에서는 핵폭탄을 실험하고, 갑작스러운 경찰과 도둑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외계인이 방문하여 소행성 조각을 잠시 가져갔다 돌려놓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들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마치 현실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현실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맞닿아 있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을 숨기려 애쓴다. 그런 이들이 찾고자 하는 건 삶의 의미이다.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명확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삶의 의미가 이 우주 어딘 가에 있을 거라는 믿음과 함께. 글의 서두에 등장했던 배우 역시 같은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영화는 배우와 같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차가운 진실을 들려준다. 삶의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차가운 진실처럼,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도 삶의 의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영영 모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는 차가운 진실 뒤에 조그맣게 따뜻한 말을 더한다. 삶의 의미는 모르지만, 잘하고 있다는 말.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고,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르지만 나름대로 잘 살아간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데 의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이상한 세상을 살아내는 것만으로 잘하고 있는 것이고, 삶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삶의 의미를 애써 찾아내는 것보다는 알 수 없는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마주 보며 대화하는 애스터로이드 시티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