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재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페이스트리
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을 반죽에 섞고
언덕이 부풀 때까지 기다렸어요
물려받은 빵집이거든요
무르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사람이 강물이죠 눈빛이 일렁거리죠 사랑은
사람 속에서 흐르고 굴러야 사랑인 거죠
인연은 크루아상처럼 둥글게
만두 귀처럼
레슬링으로 뭉개진 시간의 살처럼
나는 배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요
저마다의 별 무리 저마다의 회오리
저물녘이면 소용돌이치는 무궁화 속에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가장 아름답게 무너질 벽을 상상하는 것
페이스트리란
구멍의 맛을 가늠하는 것
우리는 겹겹의 공실에 개들을 둔 채
바스러지는 낙엽의 소리를 엿듣고
뭉개지는 버터의 몸집 위에서
우리 여름날의 눈부신 햇빛을 봐요
나는 안쪽에서 부푸는 사랑만 봐요
불쑥 떠오르는 얼굴에 전부를 걸어요
오븐을 열면 누렁개가 튀어나오고
빵은 언제나 틀 밖으로 넘치는 거니까
빵집 문을 활짝 열고 강가로 가요
당신의 개가 기쁨으로 앞서 나갈 때
해 질 녘은 허기조차 아름다워서
우리는 금빛으로 물든 눈에 손을 씻다가
흐르는 강물에서 기다란 바게트를 꺼내요
혹시 민트초코를 좋아하십니까 짙푸른
허브의 입술이 궁금하다면
파랗게 키스하자 젊은 혀들아
어금니에 박힌 초콜릿 조각을 함께 녹이며
우리는 우리의 청량(淸凉)을 완성합니다
- 고명재 <비인기 종목에 진심인 편> 중 일부
시와 입술
당신 셔츠의 소매가 곱게 사각거릴 때
어쩌면 우리는 튀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명재씨, 부르는데 입을 맞출 뻔
번들거리는 입술로 순간 환해져버릴 뻔
눈귀코로 사랑이 바글대고 있는데
솟고 싶다 헤엄치고 싶다 비 맞고 싶어
기름은 씨를 꾹꾹 짜낸 빛이라서요
좋은 튀김은 아침볕과 색이 같다고
늙은 조리사는 손등을 보여주었다
안이 다 비치지요?
여름옷처럼
얇은 튀김옷으로 우린 갈아입고서
그렇게 커튼을 손목과 강을
시와 입술을
반투명하게 읽고 반쯤 사랑해버리고
자꾸만 솟는 사랑의 은유를 젓가락으로 누르며
우리는 온갖 기름진 말을 나누는 것인데
참기름: 한국에선 가장 참된 것
모든 요리의 마무리로 금박을 입히죠
카놀라유: 유채 꽃씨를 힘껏 짜낸 것
꽃이 될 뻔했던 씨의 땀이었다니
그래서 호박이 이렇게 밝고 고소한가요
올리브유: 올리버올리버올리버올리버
당신의 이름을 연거푸 말하면 여름이 불타고
해바라기유: 맥주를 따르며 웃는 걸 본다
개기름: 눈길만으로 불이 붙을 때
입술이 옴짝달싹 기름을 바르고 리듬을 입고 마음을 업고 무릎을 꿇고
미강유: 아름다움에 대해 강하게 말하자
쌀눈유처럼 사랑의 눈을 번쩍 뜬 채로
몰라유: 전라도로 여행 갈래요
사랑을 해야지 심장을 구하자 기름 속에서
작약이 모란이 겹벚꽃이 흐드러지는데
늙은 조리사가 살짝 윙크를 한다
마음 속 깊이 두 손을 담그면 별들이 튀고
너무 익으면 날 수도 있어 장대를 다오!
튀김기 속에서 새우들이 솟아오른다
뜸
한의사는 골똘히 손목을 짚더니 안개꽃이 한 다발 보인다 했다 차갑고 외로운 식물이에요 눈 내린 대나무 숲처럼 고요하지요 명재씨는 속이 차요 뜸을 좀 뜹시다 뱃가죽 위로 쑥이 타고 매캐해질 때 나는 죽은 사람을 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졸업식마다 안개꽃을 들고 온 사람, 가장 많은 수의 꽃송이를 주고 싶었어 가족을 불리고 아침을 차리고 붐비게 살아 그래서 지금 나를 버리는 거라고 했다 그때부터 콧구멍엔 안개가 피고 눈 속에서 백내장이 흐드러지고 그래도 이건 진실이야 사랑해서, 우리는 박하를 짓이겨 배꼽에 밀어넣었어 그럼 언젠가는 네 머리에서 박하향이 날 거라고 우린 실패했고 집은 조용하지만, 쑥이 다 탔을 때쯤 눈이 내린다 배가 돌고 손이 녹고 아이가 부풀고 내가 바란 것은 꽃도 향도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