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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xtHaDes May 18. 2018

눈 감고 절벽을 향해 달리는 동안 우리의 자세

카론의뱃노래 : 일상의 노래

카론(CARON)


망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는

아케인 강의 뱃사공 카론은
그리스어로 기쁨을 뜻하는 카라와 그 어원이 같다
그래서 카론의 노래는 기쁨의 노래기도 하다

떨어진 듯 붙어 있는 무경계의 일상日常 일상像을 오가며

배 위에 올라탄 이들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났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1952년 발표되었다.
전쟁중에 태어난 소설 소나기엔 전쟁의 잔혹함도

살아 남은자의 절규도 없다.
소녀와 소년의 풋풋한 감정만이 서사를 채운다.
전쟁중에 전쟁에서 벗어난 듯, 마치 남의 일인양,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 쓰여진 그 글이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전쟁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무엇인지 고민했을까,
아니면 이와중에도 문학은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한다며 그 고매함을 우러러봤을까,
그것도 아니면 일어난 사회적 가치붕괴에

지성인의 칼날이 글에 드러나지 않음을 한탄했을까


지금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경쟁이다

그런 이 시대에 무채색과 파스텔 향의 글이 인기다.
체념한듯 해탈한듯 초연한듯 덤덤한듯 써 내려간

그런 힘을 뺀 글,
나는 그런 글이 어쩔 땐 얄밉다.  

나는 이렇게 절박하고 초조한데, 글은 저 멀리서서
열정의 일상을 촌극으로 치부한다


'너무 열심히 살지마, 그래도 달라질 것 없어 다 비슷해'

모르핀과 헤로인은 모두 아편이 어머니다.

위로의 글도 모르핀 아니면 헤로인 일 것이다.
그런글 역시 번뇌와 고뇌와 퇴고와 퇴짜를 지나

마케팅과 출판업계가 다채롭게 조여오는 환경에서
간신히 숨 내쉬며 내놓은 결과물일텐데

그 여유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 하기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최근의 글들이다.

1년 뒤, 5년 뒤에도 그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게될지 궁금하다.


인터넷에서 보면 번듯해보이는

서비스와 기업도 막상 취재를 가면 미래가 암담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앞으로 계속 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며 말이다.

팬이 많아서 돈을 버는 사람은 스타밖에 없다.


어쩌면 저자는 책에서 만날 때가

가장 이상적인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얄미움의 감정은 나의 결핍과 경험이

어딘가에 닿았지만 발산되지 않고
속으로 삼킬 때 자라나는 감정이다.

나의 결핍과 경험이 어디에 닿았는지
고민해봤을 때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P 일 것이다.
라틴어보다 어려운 게 건물주의 언어인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접근으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가끔 궁금하다. 내 이야기는 P앞에서 종종

그가 받는 월세보다 사소한 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도 늘 내게 사소하면 누군가에게도

사소할 것이라 전제 후 위로를 시전한다.

고민하는 사람 바보되고 열정적인 사람 호구 만드는

사상적 건물도 없으면서. 촌극이다.

인류는 ‘신’의 시대를 지나 ‘돈’에게

그 지위를 넘겨주는

댓가로 비교적 안정적인 생존을 보장받았다.

자본주의, 수정 자본주의 여러 문제점의 어미지만

앞서 인류가 합의한 여러 가치관 보다는

꽤 다정한 측에 속한다.

신분 간 이동이 가능한 최초의 구조니까.
여전히 신분 간 이동은 어렵다.

그래도 이동한 선례가 있긴 있다. 서점으로 가

서 있지 않고 누워있는 책들을 보면 이동한 사람의

기행문'企行文'을 읽을 수 있다.

중세에 보던 기사문학이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기적같은 일은 월급을 받으며 일어나진 않아서일까

창업관련 무료강좌와 관련 책, 한 두권쯤 읽어야 미래설계하는 듯한 느낌 뿜뿜하는 시대에

오히려 창업가P의 이야기가 현실적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려면 창업을 하지말고 공부해서

전문직을 하라,우리를 기다리는 건 고도의 성장기가 아닌
인구절벽일뿐이다"


참 아쉽게도 우리는 김치가 있고 싸이가 있고

강남스타일도 있는데 내수시장은 없다.

피폐한 삶과 임박한 죽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고민하는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일단 나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현인의 가르침을 본받아 피폐한 삶을
선택하긴 할 것이다. 눈을 감고 절벽으로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눈 감고 모두가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뛰는 동안 신발이 나이키면 어떻고 무명의 신발이라면 어떠한가 싶다가도 이내 절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금 내가 신은 신발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망각은 그만큼 강력하다.

우리는 어제의 죽음을 잊고 오늘의 신발에 집중한다.

때때로 이런 인간이 과연 합리적이란 사고가 가능한

개체인지 궁금하다. 자연의 비웃음이 들리는 듯 하다.


죽음관觀이 생존관觀에 영향을 주는 것을 보면

죽음은 끝, 생존은 시작 이렇게 단정지을 순 없을 것 같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오늘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

살아 있는 오늘을 죽음이 결정한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죽음이 어디쯤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선 나는 오늘의 끝에 도착했다

타인의 삶속에 조연으로 자리하며 그들의 주어진

각본을 수정하도록 하는 끝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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