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해하고 싶진 않나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인간관계에서 많은 괴로움을 느꼈다. 지금과 그때의 다른 점은 괴로웠던 순간들을 어른의 얼굴로 대처한다는 것뿐. 자랐다고 해서 결코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의연함은 생겼다. 끊어지는 인연이 구태여 노력하지 않은 채 어른의 얼굴로 많은 사람들과 헤어졌고, 뒤돌아 빠르게 받아들였다. '아, 저 사람과 나는 여기 까지는구나.' 하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에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로 친구와 연을 끊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한들 결정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가끔 그 친구가 꿈에 나타났다. 그들과 예전처럼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마음이 통한다고 느낄 만큼 대화를 이어가며 웃었다. 어느 날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그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인연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연의 방향이 바뀔 순 있었다. 뒤늦게 미움을 거둬내니 그 친구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싶은 게 진짜 내 마음이었다.
그 이후로 되도록 사람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싫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만을 별개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행동 단 하나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려 하고, 그 행동이 내가 오해하고 의심하는 '본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것과 행동만을 질책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고, 두 개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습관은 나에게 많은 미움을 거둬갔다.
어떤 누구는 나의 이런 행동을 '착한 척'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사람이 너에게 그렇게 행동했는데, 어떻게 안 싫어할 수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미워하지 않는 건, 나를 위한 일이라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나를 더 괴롭힌다고.
미움은 덩굴 같아서 그런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면 나를 부정적인 사고로 얽어놓는다. 다른 사람이면 쉽게 용서할 일도 미워하는 사람이라서 나를 더 화나게 만든다. 화는 화를 부르고, 미움은 증오를 부른다. 웃는 얼굴을 굳히고, 표정을 병들게 한다. 나라고 모든 순간을 용서하는 건 아니다. 그저 꾸준히 노력할 뿐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는 싫으니까. 그것만큼 감정 소모가 심한 일도 없으니 말이다.
애정이 있어야 원망도 한다. 그래서 미움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자꾸 떠오를 때마다 난 생각한다.
어쩌면, 미움보다 이해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