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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영 May 06. 2019

상실감이 반드시 사랑은 아니다

포기한 게 많았던 연애라면


원시부족들이 성인식에 큰 희생을 치르도록 하는 이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성인식에 희생이 크면 클수록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성취감'을 더 크게 맛본다는 것이다. 코를 뚫고, 귓불에 큼직한 돌을 박아놓는 등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이 방법들은 실제로 부족의 충성심을 깊어지게 하는데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했다. 


한 번은 그런 경험이 있었다. 사람에게 신물이 나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을 때, 그때가 아니면 그를 놓칠까 봐 성급하게 연애를 시작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지만, 그런 건 만나면서 사랑으로 서서히 치유될 거라고 믿었고, 때문에 여러 가지를 포기했다. 준비가 안 됐기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나름대로의 희생과 무리한 노력으로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갔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나를 갉아먹는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연애는 끝났고, 상실감이 남았다. "이렇게까지"에 포함된 나의 무수한 노력과 희생의 값어치가 땅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끝날 연애에 왜 나는 그런 노력들을 해왔을까, 내가 했던 과거의 선택에 자책과 원망이 들었다. 시작과 동시에 희생이 컸던 만큼 후회의 크기가 더해졌다. 그런데 더 황당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연락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내가 더 노력할 수 있을 것 같고, 그가 바뀔 수 있을 거란 망상에 빠졌다. 


하지만 그건 곧 상실감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시부족이 큰 희생을 치를수록 깊어지는 충성심만큼, 포기한 게 많았던 연애는 나에게 큰 상실감을 남겼고 그 감정은 곧 '미련'이란 허울 좋은 감정으로 둔갑했다. 미련은 반드시 감정의 형태로만 남진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상실감, 허탈감, 회의감에서 오는 미련도 있었다. 연인을 잃은 상실감이 반드시 사랑이 아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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