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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스틴 Feb 04. 2021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마주한 찌질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필자의 청소년기를 매료한 헤르만 헤르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세계를 깨부수고 싶었다. 자본주의, 입시지옥, 무한경쟁.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내 일상을 지배해버린 수많은 잣대와 목표들. 질식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 한국식 경쟁교육을 받고 오로지 대학을 목표로 도식화되어 버린 나의 청소년기. 지금 생각해도 가엾다.


하지만 다수의 관성을 따르는 건 쉽고, 안전한 길이었다. ‘신물 나는 경쟁사회’를 증오했지만, 정작 그 사회의 충실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했다. 대학에만 가면, 기어코 이 알을 깨고 날아오르리라, 그때는 다르리라. 좌절과 모순이 뒤섞인 감정들을 묵혔고, 때로는 방관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마침내 대학에 들어갔고, 전공으로 스페인어를 선택했다.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선생님의 권유를 따랐다. 딱히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언어를 공부할 것. 어떤 언어를 공부할지도 모르겠다면, 스페인어가 전도유망한 언어라는 것. 독일어에서 미래를 보지 못한 독일어 선생님의 (애석한) 선견지명이였다.


막연히 생각했다. 스페인어를 공부해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리. 이 지긋한 한국사회에서 벗어나, 라틴아메리카를 품으리라. 그렇게 대학에 입학했고, 어느덧 눈 떠 보니 나는 지구의 대척점이라는 곳,  한국에서 더 멀래야 멀 수도 없는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새로운 일상을 일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구 정반대편에서 제일 먼저 마주한건, 찌질한 나의 모습이었다. 경쟁사회 '모범시민'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의 모습. 약 십여 년 간의 무한경쟁 속 마모되고 석화돼버린 나는, 아르헨티나의 자유분방함에 허둥대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친구 집에 모여 술이라도 마실 때면,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 어떻게 끼여들어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지 못했는데, 그들은 와인의 품종을 논하다가, 포도 재배방식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다가, 아르헨티나의 1차 산업과 세계경제의 관계 내지는 포퓰리즘에 대한 저마다의 유감을 표하며, 치열한 잡담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와인이든,  뮤직이든, 베트남 전쟁이든, 심슨 시즌 투 8화에 나오는 호머의 익살스러운 대사든. 그들은  어느 주제에 대해서든 언제든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같았다.  얘네가 퀴즈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쪼록 '만물에 대한' 탁상공론의 마지막에는 항시, 흥을 이기지 못한 친구들의 기타 연주와 댄스가 이어졌다.


나는 단 한마디도 거둘 수가 없었다. 언어적 장벽도 있거니와, 결정적으로 당최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시면서 한 번도 포도의 재배방식에 의문을 가진 본 적이 없는 나였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에 나오는 연도란 연도는 그렇게 외어댔건만, 베트남 전쟁이라치면 떠오르는건 자본주의... 공산주의... 라는 주어도 사건도 없는 두 단어 뿐이었다. 내가 당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라 함은 해외인턴취업 인터뷰 팁, 일주일 만에 토익 점수 만들기 따위의 피상적인 ‘트릭’ 과 같은 것들이었다. 아르헨티나 친구들의 안중 밖인, 어쩐지 째째하고 찌질한 그런 주제들.


‘Y, 너는 즐겨 듣는 장르가 뭐야?’ ‘어떤 악기 다룰 줄 알아?’ 그들에겐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이, 내 피상적인 인생에 대한 도발처럼 느껴졌다. 그때 처음으로 나에게는 '취미'도 '취향'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 아르헨티나 친구들처럼 침을 튀기며 열정을 쏟을만한 거리가 나에게는 없었다. ‘난 정말 작은 세계에 갇혀 살았구나, 아무것도 아는 게 없구나’ 아르헨티나 친구들과 지낼수록 내가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지적인 열등감, 혹은 좌절감 같은 기분이었던 거 같다.


물론 한국에 살면서도 취향이 확고한 사람은 많다. 다만 나는 그렇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당시 우리 교육체계가 개인의 취향이나 즐거움을 우선시하는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 생활의 상위에는 학업성적과 대학입시 등 더 ‘중요한’ 사회적 목표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아르헨티나 친구들의 공통점은 매사에 참 호기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정보를 탐색했고, 그렇게 알게 된 지식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잡담을 통해 확인하는 게 일상인 듯했다. 도대체 저런 호기심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지. 신기했다. 매일 밥상에 오르는 흰쌀밥을 먹으며, 쌀의 기원에 대해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의문을 품은 적이 있던가?


아르헨티나에서의 하루하루가 쌓여갈수록, 결심이 섰다. 나를 바꿔야겠다. 생산성에 목매는 찌질이. 시험제도가 낳은 헛똑똑이. 호기심 없는 피상적 인간. 경쟁체제가 빚어낸 '나'라는 타성을 타도해야 했다. 그때부터 취향과 쾌를 중요시하는 삶의 태도를 추구하게 된 것 같다. 한 번 사는 인생, 기타 치느라 손 끝 한 번 즈음 갈라져 봐야지 하면서 기타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 그놈의 '학원' 의존은 여전하다 - 3번 이상 돌려봐서 주인공의 명대사 즈음 함께 읊조릴 수 있는 영화도 생겼다.


서서히 변화를 느꼈다. 내면의 차오름을 느꼈다. 시험, 경력 등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내면의 쾌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렇게 알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아르헨티나 생활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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