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비밀의숲2'
“검사님 사람 참 볼 줄 모르시네. 내가 한 주임 때문에 자폭할 사람으로 보여요?”
이렇게 말했던 최빛 부장은 ‘자폭’한다.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이 덮어뒀던 과거의 잘못을 고백한다. 실은 한 주임(한여진 경감)을 살리기 위해 자폭한 것이 아니다. 그가 옳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후배 한여진 경감의 믿음에 부응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 일에 깊숙이 연루돼 있는 사람, 우태하 대검찰청 부장의 비리를 밝혀내려면 최 부장이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 부장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간 황시목 검사의 말이 결국은 최 부장을 움직였다. 협박도, 읍소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한 경감님이 크게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상대가 최 부장님께 경칭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 경감님은 사람한테 마음을 잘 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또 아무나 끝까지 받아들이진 않습니다. 두 분 사이에 그런 유대감이 일방적일리 없다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저는 그런 한여진 경감의 안목을 믿고 지금 여기 왔습니다. 뭐 어떤 양심의 기대를 걸어서가 아니라요.”
‘두 분 사이에 그런 유대감이 일방적일 리 없다고 생각했고요.’ 이 한 마디에서, 무릎을 쳤다. 이 대사를 듣기 위해 ‘비밀의 숲2’를 끝까지 봤구나. 검찰과 경찰의 갈등을 큰 줄기로 이어 온 시즌2는 흥미진진했지만, 시즌1에 비해서는 긴장감이 떨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가 검경의 세계에서 여성들의 동료애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시즌1보다 더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가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도 남성 주인공의 조력자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여성 캐릭터끼리의 우정은 당연히 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초반 최빛 부장이 한 경감을 ‘끌어주는’ 선배의 모습을 보일 때 나는 조금 열광했다. 남성들이 ‘형’ 문화로 서로를 끌어주고 받쳐주는 모습을 보며 홀로 외롭게 버텨 온 최 부장이, 여성 후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과거의 과오를 덮고 있는 걸 알게 된 한여진 경감에게, 최빛 부장은 함께 침묵 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런 생각 안해봤니? 이번엔 너하고 내차례야, 나하고 국장님처럼. 이번엔 내가 손잡고 널 끌어줄 수 있어.” 자신이 국장의 과오를 덮어준 공으로 이 자리에 올랐 듯, 자신의 과오를 덮어주면 너 역시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한 여진 경감은 그런 선배의 모습을 존경했던 게 아니다. "왜 그러세요, 진짜. 왜 스스로를 후려치세요? 그딴 손 안 잡았어도 단장님은 좋은 자리 가셨어요, 원하는 만큼 되셨을거 라고요, 단장님은. 몇년 빠르긴 했겠지만 대신에 내내 남이 앉혀줬다고 생각하잖아요. 본인이 따낸 게 아니라.”
‘그딴 손 안 잡아도 좋은 자리에 갈 수 있었던 사람이, 왜 자꾸 스스로를 평가절하 하느냐.’ 선배가 좋은 후배를 알아 본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후배 역시 좋은 선배를 알아보았다. 그 믿음을 저버리는 선택을 최 부장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폭로하며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 최빛이 자신의 제복을 어루만지며 짓는 표정이 그의 선택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이었는지 알려주었다.
두 여성 간의 우정과 의리는 마지막에 다시 한번 확고해 진다. 최빛 부장의 일을 밝혀냈다는 이유로 한 경감은 조직에서 왕따가 된다. 새로 온 정보부장은 ‘최 부장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한 경감에게 함께 잘 해보자는 의미로 손을 내민다. 최 부장이 자신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 한 경감이 어떤 상황에 처해질 지까지 미리 내다 봤다는 의미다.
남성들이 대부분인 직장에서 관리자로 성장하기까지 여성들이 어떤 과정을 겪는지, 미디어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너무 처절해서 일까. 한 경감은 자신을 견제하는 남성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댁들이 맞았다는 걸 보여줄게. 날 견제하고 밀어 내려던 게 기우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 백 없이도.” 여성 조력자 캐릭터였던 한 경감은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즌1 때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검사장의 아내로 그려졌던 이연재 캐릭터도 시즌2에서는 더욱 색깔이 확실해졌다. 김병현 성문일보 사장에게, 자신을 한조 회장으로 제대로 인정하고 기사를 내보내라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그는 “날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 봐달라”고 말한다. 2015년 이후 최고치의 기업실적을 달성한 게 본인인데, 자신과 관련된 기사에 달리는 댓글은 어떤지 보라며 읊는다.
“여자 회장 위상 세우려면 저런 년 정신 상태부터 뜯어고쳐라”, “남편죽고 애비는 감옥가서 동정표로 회장됐으면 적당히 날뛰어야지”, “아줌마 맨날 드라마만 쳐보니까 회사가 쉬운 줄 아네, 이제 연하남 본부장이랑 연애만 하면되나.” 하이퍼 리얼리즘도 이런 하이퍼 리얼리즘이 없지 않나.
그에 대한 성문일보 사장의 대답은 시청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기업인으로 보기에 니 입술이 너무 빨갛다.” 그 말을 들은 이연재 회장의 행동은 시청자들의 기대를 뛰어 넘는다. 어이 없는 듯 실소를 터트린 그는 립스틱을 지워버린다. 눈 화장까지도.
이연재 회장의 남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옳은 것’을 지키려 했던 정의의 사도라면, 자신의 회사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이 회장은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가 마지막 화에서 보여준 대사는 검찰 조직에 대한 작가의 일갈인 동시에,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고, 시청자에게 날리는 한 방이었다. "그래도 나 하나도 안 미안해. 그의 마지막이 내가 하는 일에 영향을 끼쳐야돼? 내가 회사를 위해 한 결정을 그 사람 뜻에 맞춰야돼? 천만에. 나은 길을 가? 사람 하나에 좌우되는 게 무슨 빌어먹을 조직이야.” 그 동안의 아내들이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더 나은 길’을 가려 했다면, 이연재는 미련 없이 그 길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여자 배우가 전면에 나서는 작품이 없다. 그리스 시대부터 2000년 동안 쌓여 온 작품들이 남성중심이다. 여배우들 역할이 ‘엄마, 젊은 여자, 창녀’ 세 가지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게 그 때문이다. 여자가 세상을 바꾸는 해피엔딩이 없다. 아니면 바꾸다가 주인공이 죽는다.”
2017년 여성 연극 연출가들을 인터뷰 했을 때 들은 이야기다. 방송,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2019년에 방영됐던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도 인상 깊었다. 경쟁의 중심도 여성들, 배신하고 도와주는 일도 여성들이 하는 것. 남성들의 권모술수에 들러리로 서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권모술수의 중심에 서는 것. 그런 드라마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당시 인터뷰에서 한 연출가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매력적으로 사회를 뒤집어 놓는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드라마를 좋아하는 친구가 비밀의숲2 마지막화 방영 전 최 부장은 이름이 ‘최빛’이기 때문에, 분명 자신의 잘못을 밝히는 선택을 할 것이라고 예언(?) 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 말이 맞았다. 최빛 부장이 비밀의숲3로 컴백해서, 한국 드라마에 빛을 더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봐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