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올해 초 N번방 사건이 안겨준 충격과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N번방 가해자들은 스마트폰과 채팅 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더 악랄해진 방법으로, 여성들을 특히 어린 청소년들의 성을 착취했다. 하지만 세상이 5년 전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지지 못했다는 생각은 조주빈 등의 범행 수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부'(라고 쓰고 대다수라고 읽는) 남성들이 던지는 질문 때문이었다.
“뭔지 모르고 별 생각 없이 링크를 타고 들어갔는데 처벌 받나요?” N번방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 성과가 보이고 주도자들의 검거 소식이 들리자, 온라인에는 이런 질문이 줄을 이었다. N번방은 익명이 보장되는 ‘텔레그램’ 앱에 개설된 채팅방에서 벌어진 성 착취 사건이다. 더 잔인하고 선정적인 성 착취물을 공유받고 싶은 사람들은 신분을 인증하고 돈을 지불했다. 이들의 질문은 이런 의도다. 자신은 주도자도 아니며, 별 생각 없이 누구나 보는 음란물을 보았을 뿐이며, 돈을 지불한 가담자들에 비하면 훨씬 약한 수위의 성 착취물을 보았을 뿐인데, 요약하자면 나는 죄가 없는데, 그럼에도 그 채팅방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을까 두렵다는 호소들이었다. 내 마음과 달리, 아직 한국의 법은 관대하다.
내가 절망한 지점은 바로 이들의 질문이었다. 5년 전 '아청법'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그들은 5년 후에도 그대로였다. 그해 6월 헌법재판소는 어린이나 청소년으로 보이는 사람이 등장한 음란물을 규제하도록 한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러자 온라인에는 “애니메이션 추천 목록을 보고 다운을 받았는데, 아청법에 걸려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지" 묻는 질문이 잇따랐다. N번방의 그들과 정말 판박이다. 당시 '성범죄 형량을 줄여드린다'는 카피를 내 건 변호사 사무실들도 우후죽순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 '서프러제트'는 20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에겐 참정권이 없었다.
#2.
언뜻 달라진 듯한 세상이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의 참정권 운동을 다룬 ‘서프러제트’, 1970년 역시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미스 월드’ 대회에 반발하는 여성들의 운동을 다룬 ‘미스비헤이비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나라에서 57년이 지난 후의 모습을 보게 된 점은 흥미로웠다. ‘서프러제트’의 여성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투표권은 얻게 됐지만 ‘미스비헤이비어’의 세상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 공부하는 여성은 여전히 적고, 학계에서 무시 당하며, 여성의 외모와 신체는 가축처럼 치수를 매겨 평가하는 세상이다.
국회의원을 뽑을 권리가 없는 건 물론, 여성의 자식에 대한 권리와 재산권이 모두 남편에게 귀속되던 시기에 비하면 '미스비헤이비어' 속 세상은 '서프러제트' 보다는 나아졌다고 보일 것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두 영화 속 세상에 비하면 2020년의 한국은 여성 인권이 훨씬 향상된 곳이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N번방 사건이 일어나며, 유력자들에 의한 성폭력 범죄 피해를 용기내 고백해도 '꽃뱀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큰 힘을 가진 곳이 한국이다.
세계에서 성평등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들 중 한 곳인 스웨덴에서는 ‘평등이라는 것의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인식한다. 9월 18일 세상을 떠난 미국 대법관 루스베이더 긴즈버그는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나 있어야 충분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전원"이라고 대답해 왔다.
#3.
그럼에도 세상을 진보시키는 건 여성들의 행동이다. 영화 ‘서프러제트’와 ‘미스비헤이비어’의 주인공은 성 차별에 마음 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처음엔 ‘행동’하는 것에 동참할 마음이 없었다. 영화는 이들의 각성 과정과 그 후의 여성들의 연대와 운동을 그리고 있다. ‘서프러제트’의 모드 와츠와 ‘미스 비헤이비어’의 샐리가 각성하는 계기는 ‘딸’이다. 어머니에서 이어져 온 착취가 자신의 딸에게까지 이어지는 역사는 끊어야겠다는 마음이 이들을 행동으로 이끈다.
모드에게는 아들이 있다. 훗날 남편이 아들을 마음대로 입양을 보낼 정도로 여성에게는 자식에 대한 권리조차 없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아직 서프러제트들의 행동에 동참할지 고민 중이던 모드는 어느 날 남편에게 묻는다. “우리에게 딸이 있었다면 그 아이는 어떤 삶을 살게 됐을까?” 남편은 무심히 답한다. “당신과 같은 삶.” 이 대답을 들은 모드는 남편을 속이고 여성 동료들의 모임에 참석한다.
모드는 어머니에 이어 평생을 세탁공장에서 일해 온 노동자다. 어머니는 자신이 4살 때 공장에서 세탁 통이 뒤집혀 화상을 입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가스에 중독되거나 손톱이 으깨지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 일한다. 게다가 사장이 행하는 성추행의 위협도 견뎌야 한다. 그런데도 봉급은 남성보다 적다.
모드에겐 딸이 없지만, 딸과 같은 후세대 여성들을 위해 거리로 나선다. 모드의 분노는 자신에게 여성 참정권 운동의 중요성을 처음 알려줬던 직장 동료 바이올렛의 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장인 테일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극에 달한다.
‘미스비헤이비어’의 샐리는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우는 상황에서도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싶어할 정도로 깨어 있는 여성이다. 하지만 거리에 그래피티 등을 통해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는 페미니스트 활동가 조 로빈슨의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랬던 샐리가 조와 동료들에 동참하게 된 이유도 딸이었다. 샐리는 딸이 미스월드 방송을 보면서 여성들의 표정과 행동을 흉내내자 TV를 꺼 버린다. “애비가 보는 게 싫어. 여성비하에 성차별이야”라고 말 하면서.
'미스비헤이비어' 속 샐리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자신의 딸 때문이었다.
#4.
두 영화는 여성 동료들 간 연대를 보여준다. 연대의 힘은 크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목소리에 반대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서프러제트’에서 거리에서 시위하다 경찰에 잡혀간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창피한 존재다. 이웃들에게도 외면 당한다.
‘미스비헤이비어’에서 샐리는 ‘여성해방운동’의 뜻을 전하기 위해 뉴스에 출연하게 된다. 미스월드에 참가하는 여성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외모를 줄세우기 하는 문화가 잘못됐다는 의미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여성 앵커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다”며 남성들과 함께 샐리의 말을 무시한다. 때로는 땅 바닥에 떨어진 남성들의 젠더감수성보다도 무심한 여성들의 모습이 더 마음 아프다.
현실에서도 모녀 간 갈등은 어렵지 않게 보인다. 자유를 갈망했지만 가정과 자식을 선택한 (그 이유는 당연히 남편이 가정과 자식을 돌보지 않아서지만) 어머니와 그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은 딸 사이의 갈등이다.
“엄마는 비좁고 구속하는 가정이란 세계에서 포부나 기회도 없이 갇혀 살았다. 아무도 엄마처럼 되어선 안 된다.” 샐리가 여성 해방을 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샐리는 가정에만 갇혀 있던 엄마보다, 모험을 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아빠처럼 되고 싶다. 그러나 “내가 너처럼 행동했다면, 비좁은 가정이란 세계를 등한시 했다면, 너와 네 언니들을 어떻게 됐을까” 묻는 샐리 어머니의 질문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 시절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 한 그들이 성차별을 공고화한 것이 아니며, 가사노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말이다.
#5.
넘어서야 할 건 여성들보다는 남성들의 여전히 굳건하고 거대한 성차별적 시각이다. “우리가 창문을 깨고 물건을 불태우는 건 그게 남자들이 알아듣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반은 여자다. 우리 모두를 막을 순 없다.” 모드 와츠가 경찰에게 하는 이 대사는 '서프러제트'의 명대사로 꼽힌다. 결국 남자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말하기 위해 에밀리 데이비슨은 1913년 더비 경마대회에서 국왕의 말에 몸을 던진다.
‘미스비헤이비어’에서도 여성들은 여전히 인류의 반이라는 무게감을 인정받지 못한다. ‘여성 노동자의 시각’이라는 샐리의 논문 주제를 두고 교수는 “너무 국한적이다, 소수의 관심사다”라며 바꿔보라고 조언한다. 여성 노동자의 시각을 다뤄보겠다는 '온건한' 주제를 낸 샐리는 ‘기득권에 반기를 든 망나니’로 취급된다.
'나로 인해 다른 소녀들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믿음으로 여성들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6.
‘미스비헤이비어’는 영화 말미 실제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주인공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1970년 패기 넘치는 젊은 여성들이었던 이들은 어느새 노년의 멋진 여성이 되어 관객과 눈을 맞춘다.
그렇지만 내가 꼽는 명장면은 감옥에서 나온 샐리를 안아주는 샐리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도 우리 엄마 말 안 들었다"는 어머니의 모습은 결국 후세대를 위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딸의 말에 동의하는 또 다른 여성의 모습으로 보였다. 앞으로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이 이 대사에 담겼다.
미스월드 창시자의 아내인 몰리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여전히 1950년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며 “시대에 적응하든가, 망하든가” 두 개의 선택지만 남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는 데 반기를 든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망하는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깨달은 것이다. 몰리 부인은 여성해방운동이 미스월드에 난입해 시위한 다음 날 신문 기사를 보고 이들을 향해 “똑똑한 여자들”이라고 말한다. 미스월드 진행자 밥의 아내도 이들의 시위 장면을 TV로 지켜보며 미소 짓는다. 앞선 세대 여성들의 이 미소가 바로 희망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서프러제트’ 5년 후 영국은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 후 10년 뒤에는 모든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됐다. 아주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쟁취한 것이다. 영화 말미 크레딧에는, 세계 각국의 여성 참정권 인정 역사가 등장한다. 카타르는 2003년,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에야 인정된다. 최근까지도 수 많은 여성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스비헤이비어'에서의 마지막 문구도 "가부장제를 붕괴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7.
두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나로 인해 다른 소녀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미스 그라나다의 말이다. 그가 '미스월드'에 출전한 이유는 인종 차별이 극심한 상황에서 흑인 소녀들에게 꿈을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은 '딸'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었던 '서프러제트' 속 여성들의 믿음과도 다르지 않다. 2020년을 사는 우리의 현실이 때로 절망적일지라도, 희망은 여전히 이 문장 속에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