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2020)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그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끝나지 않는 동화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이 끝끝내 함께 행복하게 살지 못하더라도 그것 역시 동화의 결말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나서도, 그 결말이 곧 '새드엔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는 스스로 행복하기 위한 길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요즘 이런 결말을 기다린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처음 보았던 15년 전의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츠네오가 조제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내가 도망친 거다.” 조제의 불편한 다리든, 너무나 깊어진 자신만의 세계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츠네오는 자신의 말대로 도망친다.
그 죄책감, 혹은 미안함으로 길을 걷다 갑자기 주저앉아 오열하는 츠네오의 모습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렇게 미안해할 정도라면 조제 역시 힘들어하고 있겠지. 나에게 이 영화는 '조제가 홀로 남겨졌다'라는 문장으로 기억되었다.
조제의 독백도 이런 기억을 남기는 데 일조했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계속 굴러다니게 되겠지." 츠네오가 떠난다면, 자신은 다시 외롭게 침잠할 거라고 조제는 짐작했다.
하지만 조제는 물살을 따라 유유히 바닷속을 헤엄친다. 할머니가 밀어주는 유모차를 타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던 조제는 이제 혼자서도 외출할 수 있다. 전동 휠체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학생들보다는 훨씬 느리지만, 그래도 멈춰 서 있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간다. 조제는 자신의 일상으로 하루를 채운다. 집에서 홀로 생선을 맛깔나게 구워 먹으면서.
예전엔 보이지 않던 조제의 평온한 표정을 다시 보게 된 건, 한국판 '조제'(2020) 덕분이다. 한국 ‘조제’는 2020년 시대적 배경에 맞게, 그리고 한국 배경에 맞게 적절히 잘 각색됐다.
조제는 처음부터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다가 영석과 마주친다. 두 사람이 이끌리고, 상처 받고, 다시 마음을 확인하며 사랑하는 시간이 스크린에 그려진다. 5년이 지난 후, 츠네오처럼 영석 역시 조제 곁에 있지 않다.
섬세한 감정선의 연출보다도 이 영화가 좋았던 건 조제의 캐릭터, '그 후의 조제' 때문이다. 한국의 조제도 일상을 되찾았을까. 조제는 일상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상을 추가했다. 이제 조제는 스스로 자동차를 운전한다!
일본 ‘조제’에서 조제와 츠네오는 바다를 보러 여행을 간다. 츠네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국 ‘조제’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조제가 홀로 차를 운전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다. 영석에게 배웠기 때문에, 혹은 영석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라(물론 그리웠겠지만), 장애인인 조제가 스스로의 삶을 사는 모습 그 자체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석이 츠네오처럼 오열하는 장면도 없다. 조제는 홀로 버려지지도, 남겨지지도 않았다.
한국 '조제'의 명장면은 조제가 수족관에서 영석을 향해 말을 건네는 장면을 꼽고 싶다. "우리가 보기엔 물고기가 갇혀 있는 듯하지만, 물고기들이 보기엔 우리가 갇혀 있는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제 네가 없어도 괜찮아."
일본의 '조제'는 '난 두 번 다시 널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거야'라고 말했었다. 예전엔 이 말이, '너와 절대로 헤어질 수 없어'라는 의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을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이제는 이 말이 너로 인해 추가된 새로운 세계가 나의 세상을 더 넓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니까 조제는 헤어져도 괜찮은 거다.
한국의 ‘조제’는 그런 조제의 모습을 조금 더 길게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들이 ‘함께’ 행복하지 않아도, 조제는 충분히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거라는 걸. 왜냐하면 조제는 이제 그 방법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니까. 조제가 스마트폰 로드뷰를 통해 하는 방구석 여행이 아니라, 저 멀리 생경한 풍경의 유럽의 어느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그 날이 오기를.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역시 남아 있겠지만, 더 단단해진 조제를 만나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