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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non Aug 04. 2021

축구 이야기는 남자만 재미있나요?

<나혼자 산다>의 어떤 자막


아득히 먼 옛날 이런 농담이 있었다.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엔 세 가지가 있다.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그리고 군대 가서 축구 한 이야기다. 이 얘기는 주로 남자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면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 것'이라는 조언으로 전해졌다. 사실 이 이야기는 여성이 군대나 축구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의미보다는 청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별이 아니라 대화 예절이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는 여성들이 스포츠를 싫어한다는 사회적 편견이 한국에 깊게 뿌리내리는 자양분으로 쓰였다.

 

지난 6월부터 SBS에서 정규 편성된 '골 때리는 그녀들'의 화제성을 보면 일단 여자들이 축구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잘못됐다. E채널의 프로그램 '노는 언니'는 스포츠가 오래 전부터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Jtbc 드라마 ‘런 온’에서 운동화를 신는 여성 CEO로 그려진 서단아(최수영)는 과거 축구선수가 꿈이었다고 말한다. 2017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이번생은 처음이라'에서 두 남녀 주인공은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날팀 덕후다. 미디어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현실 시청자들이 미디어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정된 성역할을 해체하기 위해 TV에서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스포츠를 즐기는 이런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아득히 먼 옛날에 농담에 갇힌 프로그램을 봐야하는 현실이다. 지난 7월 2일 방영된 MBC '나혼자 산다' 403회에서 가수 박재정은 프로축구 수원삼성의 진성 팬 면모를 보여준다. 옷장에 빼곡히 걸린 수원삼성 유니폼의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 구입한 유니폼의 각을 살려 다림질 하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어떤 것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열정을 되살리게 했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남자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전달한 방송에는 문제가 있다.

MBC ‘나혼자 산다’ 403회. 가수 박재정이 프로축구 수원삼성의 진성 팬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여성 출연자들은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 자막.

박재정의 축구 사랑을 보여줄 때 방송은 남자 출연자 셋과 여자 출연자 둘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기안84와 전현무는 자신이 아는 수원삼성팀의 선수 이름을 말한다. 자막은 이들의 모습을 '축구 이야기에 남자들 흥분'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박나래, 표예진의 화면에서는 말이 없음을 나타내는 쩜쩜쩜(...)과 함께, '무슨 말?'이라는 자막을 통해 이들이 축구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에 전현무는 "너무 재미없죠?"라고 묻고, 화면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차라리 “너무 재미없죠?”가 ‘여러분이 관심 없는 이야기를 우리끼리만 해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전달되었다면 조금 나았을 수도 있다. ‘대화 예절’에 관한 이야기가 될 테니까. 그러나 이 장면은 여자 출연자들은 축구 이야기에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재미없어한다는 고정관념만 강화시켰을 뿐이다. (두 여성 출연자가 정말로 샤샤, 박건하 등 수원삼성을 거쳐간 선수들을 아예 몰랐다고 전제하더라도) 남성 출연자들이 "1990년대 선수로 뛰었던 박건하 감독이 지금은 수원삼성을 맡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간략히 설명해주는 장면이 더해졌다면 모든 시청자가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본다. 여자들이 축구하는 프로그램에서 선수들 뿐 아니라, 해설하는 캐스터도 나아가 감독도 여성인 장면을. "축구 얘기 너무 재미없죠?"라는 남성 출연자의 말에 "아뇨, 우리도 축구 좋아하는데 무슨 소리죠" 같은 여성 출연자의 말이 한 번쯤은 이어지는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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