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생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난 딸 넷 중에 큰 딸이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으니, 둘째가 1학년, 셋째가 6살, 막내가 4살이었다. 부모님이 맞벌이셨는데 그날따라 엄마가 딱 100원 놓고 출근하신 거다. 100원으로 넷이 뭘 할 수 있겠나?
"얘들아, 언니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1000까지 두 번만 세고 있어. 금방 오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가서 떡볶이 100원어치를 시켰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떡볶이는 그때 이후로 먹어본 적이 없다. 어묵 국물까지 원샷하고 집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골목 어귀부터 들리는 동생들 우는 소리, '죽었다.' 헐레벌떡 뛰어들어갔는데, "언니, 1000까지 5번도 더 세었는데 이제 오면 어떡해. 으앙~~~" 이런.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1000까지 세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백" 생각보다 너무 잘 세는 거다. 이건 계산 착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백, 이백, 삼백, 사백, 오백...... 천!"
눈물을 그치고 당당히 내 앞에서 1000을 외치던 둘째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가라앉고,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진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야, 백 다음에 무슨 이백이냐? 백일, 백이, 백삼, 백사, 백오, 백육, 백칠, 백팔, 백구, 백십...... 이렇게 해야지. 너 1000까지도 못 세는 거야?" 전세는 이미 내쪽으로 기울었다. 1000까지 한참만에 센 나는 동생들에게 "그봐~~ 1000까지 두 번만에 온 거 맞지?" 큰소리 뻥뻥 쳤다.
그날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엄마가 아시면 경을 칠 일이지만 내겐 수세기로 천하를 얻은 날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동생들에게 수세기를 가르쳤던 일이 내 인생을 이렇게 굵게 관통할지 몰랐다. 난 지금도 수(학)로 밥을 먹고 (그땐 떡볶이를 먹었지.) 숫자로 먹고 산다. 23년간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친 걸로 모자라 지금은 엄마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수학과의 인연이 질기기도 하다.
정식으로 수학교육과를 나온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과도 아니다. 나는 고전문학까지 섭렵하던 뼛속까지 문과생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에는 통분하다가 머리칼 다 빠지는 줄 알았고, 중학교 2학년에는 직선의 방정식때문에 생애 최초로 40점을 맞았다. 고등학교 2학년에는 확률 통계를 극복하기 위해 200문제를 통째로 외워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수학이 싫어서(게다가 난 영어도 싫어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국어교육과였다. 거기가면 평생 수학이랑 영어는 꼴도 안 볼 줄 알았다. 그런데 학교가 더 꼴 보기가 싫더라. 재수하겠다는 마음으로 1년을 노량진에 몸 바쳤다. 차비도 없고, 우울증에 시달려서 사람도 안 보고 살 때라 서초동에서 노량진까지 걸어다녔다. 거지꼴을 하고 다녀도 수학공부는 진짜 열심히 했다. 처음으로 '좀' 알 것 같았다.
첫번째 국어교육과, 두번째 불어과 다녔지만 학비를 벌어야했다. 마침 엄마가 학원원장이어서 생활비 대신 본격적으로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엄마 학원이 천호동에 있을 때는 고등학생을, 전농동에 있을 때는 중학생을, 만리동으로 옮기고는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낮에는 문과생, 밤에는 이과생, 낮문밤이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세기 정도면 좋으련만, 수학은 문과생에게 절대 만만치 않은 과목이다. 내가 애먹은 학년은 고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닌 초등학생이다. 의외지 않은가? 수학이 아니라 의사소통이 더 큰 문제였다. 초등학교 3학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10살이라는 나이가 아직 '인간'이랄 수 없는 나이라는 걸 알지만 그땐 그저 내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새벽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업 준비를 했다. 주변에서 다 손가락질했다. 겨우 초등학생 가르치면서 별 짓을 다 한다고.
9시간을 공부하고 딱 90분 수업하는데, 영겁의 시간이 흐른다. 24개의 눈동자가 나만 쳐다본다. 12개의 입이 쉴 새없이 움직인다. 질문과 안 질문의 경계가 거의 없다. 9시간이나 공부했는데...... 얼마나 더 쉽게 말해야 하는 걸까? 쟤는 눈이 나쁜가? 각도기 밑금도 못 찾네. 그냥 자로 길이 재는 건데 그걸 왜 못해? 귀에 못을 박아놨나? 왜 못 알아듣지? 좀 전에 물어본 걸 왜 또 물어보지? 도대체 왜, 연필이랑 지우개는 계속 떨어뜨리는거야? 수업이 끝나면 내 안엔 어제보다 더 많은 질문이 남는다. 식은땀이 나고 머릿 속이 하얘진다. 엄마, 나 중학생 수업하면 안될까?
내 공부는 수학에서 아동심리로 넘어갔다. 애엄마도 아닌데, 자녀교육서를 닥치는 대로 읽어갔다. 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지침서도 읽었다. 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들과 핫라인으로 통하고 싶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수세기로 천하를 얻었던 그 시절의 내가 떠 올랐기 때문이었을 거다. 엄마는 일하러 가고, 100원짜리 하나에 간식을 의지했던 그때의 내 모습이 떠 올랐기 때문이었을 거다. 20년 전이나 다를 바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통해 새 길을 보여주고 싶었다.
궁즉변, 변즉통. 아이들과 나는 드디어 같은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이들 언어를 익힐 수 있게 되었다. 학적은 불어과였으나, 그 기간에 얻은 학위는 초등언어학이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수학은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누가 말했던가? 초등 수학은 숫자와 식과 '한국말'로 되어 있다. 아니 한국말의 형태를 띤 '수학 나라말'이 따로 있었다. 적어도 그들에게 수학은 외국어다. 피차 마찬가지다. 수학은 나에게도 외국어였다. 가재가 게 편이라고, 수학을 매개로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나이는 상관이 없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우리는 똘똘 뭉쳐 수학을 정복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23년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마치 망부석처럼. 이제는 주객이 전도되어 낮에는 수학을 밤에는 글을 쓰는 중이다. 한 가지에 집중 못하는 건 천성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