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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Apr 07. 2023

지금 우리 눈앞의 존재를 파괴, 창조, 환영

백수린 소설 여름의 빌라 중 여름의 빌라

    여름의 빌라는 주아가 스물한 살에 처음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우연히 알게 된 중년 부부 한스와 베레나, 특별히 베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주아와 한스 부부의 인연은 베를린의 작은 서점 아시아 문학 코너에서 시작되었죠. “낯선 나라에서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여름의 빌라, 49쪽) 싶었던 주아에게 한스가 다가와 혹시 일본인이냐며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던 겁니다. 일문학 전공자인 주아가 일본어로 그에게 자신은 한국 사람이라 대답한 이후, 하이쿠를 좋아하는 독일인과 한국인 여행자의 일본어와 영어가 뒤섞인 대화로 빚은 국적 모를 우정은 한스가 주아를 그의 집에 초대하는 데까지 이르게 해요. 그리고 베를린 동역에서 한스 부부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주아가 울었어요. 그 순간이 한스 부부에게 주아를 각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시간이 흐른 뒤 베레나가 말했대요. 하지만 주아의 울음은 한스 부부의 이해를 넘어서는 세계와 미래의 자신에게로 향한 눈물이기도 했죠. 그때 그 자리에서 주아를 배웅하던 한스 부부는 주아에게 도달 가능한 희망을 상징하는 실재였을까요. 이 여행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 주아는 지호와 결혼해 독일에서 남편의 유학 생활로 오 년간 체류하며 그들과의 인연을 이어나갑니다.


   드문드문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 뜸해진 연락이 마음의 짐처럼 느껴질 만한 무렵의 어느 날, 서울에서, 주아는 남편 지호와 함께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의 한 빌라로, 나중에 그들이 여름의 빌라로 부른 장소로, 시간이 되면 와줄 수 있겠냐는 베레나의 초대 편지를 받습니다. 주아는 그들의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혼부부였던 시절을 알고 있는” 한스부부를 만나 지호와의 관계가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그 초대를 최선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지나간 시절 속의 사람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기적을 바란 건 주아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걸 그땐 몰랐지만 이제와 편지를 쓰고 있는 주아는 아주 잘 알죠. 그러니까 한스 부부와 그들의 손녀딸 레오니가 같이 한 며칠 간의 여행은 이국의 풍경 속 단란한 일행으로 시작되었지만, 각자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불화하는 일상을 떼어내지 못한 채로 마주하는 눈앞의 서로는, 서로의 기대를 필연적으로 배신하고 말겠죠. “그날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미소가 아니라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가 해준 말이었습니다. 캄보디아인이 가장 좋아하는 신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이라는 말요. 파괴가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좋은 것이라고 가이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지호는 파괴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새롭게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죠. 혁명. 나는 혁명, 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속으로 되뇌어봤습니다.” (58쪽). 과연 우리가 무엇을 파괴하면 다음 세상을 창조하는 혁명가로 이 세계를 더 이상 관광하지 않고도 온전한 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될까요.


    주아가 말해요. 레오니를 제외한 어른 넷이 발 마사지 가게에서 마사지를 받을 때 이 여행이 점점 불편해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요. 자신 앞에 몸을 수그려 발을 닦아주는 어린 안마사의 피부색과 자신의 피부색 그리고 한스 부부의 피부색의 차이를 그제야 불쾌한 마음으로 인식하게 된 거죠. 독일에서의 주아는 한스 부부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어요 “당신들은 동양을 좋아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남북 관계나 한국전쟁밖에 몰랐어요. 하지만 당신들의 동양에 한국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 부부 덕분에 여행 책자만으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세계를 좀 더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좋았습니다.” (50쪽) 캄보디아 여행 책자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이 이어지던 관광의 마지막 밤 지호는 가난하지만 낙천적인 캄보디아 사람들의 모습에 감탄하는 한스에게 “그것은 즐거워하는 게 아니에요. 그 아이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갈 뿐인 거죠.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자기보다 돈이 훨씬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걸 즐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65쪽) 한스의 감상에 따져 묻고 계속해서 그런 식의 말을 이어나갑니다. 그러다 결국 베레나가 울음을 터뜨려요. 한스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 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그렇지 베레나?”(67쪽)  


    여행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나 주아는 베레나로부터 다시 편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주아의 편지는 그 편지의 답장인 거죠. 베레나는 자신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고,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 테러에서 딸이 희생되었다고 씁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도(71쪽). 누구의 나라도 아닌 나라의 폐허와 홍수와 가난의 테두리를 배회하며 주아와 베레나는 터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잃은 엄마로 각자의 생을 견디느라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서로를 제대로 환영할 수가 없는 거였어요. 주아는 기억을 잃어가는 베레나에게 자신의 기억을 선물하기로 합니다. 엄마로도 모자라 할머니까지도 서서히 잃게 될 레오니가 캄보디아 아이에게 펼쳐 보인 파괴와 창조와 환영의 순간 말입니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캄보디아 소년 앞에 섰던 레오니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자신의 발로 레오니와 소년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는 게 아니겠어요? 레오니는 돌멩이 끝으로 소년의 뒤쪽에 새로운 선을 다시 그었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새 친구가 왔으니 원숭이님이 더 좋아하겠지?”(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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