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무릎은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날카로운 통증에서부터 시작해 멍든 아픔을 지나, 무릎으로 탄산음료를 마신다면 과연 이런 느낌 아닐까, 하는 감각에까지 이르러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바깥 날씨처럼 개입이 불가능하고,관찰만이 가능한 변화를 왼쪽 무릎에 오롯이 떠안고 지내는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무릎 한쪽이 이끄는 삶. 되도록 오랜 시간 이불을 덮고 소파에 누워 달리기를 생각한다. 정확히는 달리기를 멈추어 공백이 길어진 일상과 떨어지는 식욕, 이참에 달리기를 끊어버리고 중년의 위기를 어디 한 번 맨몸으로 대면해 보자는 우울. 아무려나, 내가 달릴 수 없다면 남이 달리는 걸 구경하면 될 일이다.
아는 여자는 달리기에 관한 영화입니다. 단순히 동치성이 비장하게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의 마지막, 동치성이 눈물 흘리며 도로를 전력질주하는 장면이 길고 인상적인 탓도 아니다. 전봇대 전선에 붙은 불꽃이 목적지까지 화재사고를 내지 않고 줄을 따라 달린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 또한 아니지만. 달리기에는 막다른 골목 끝에다다라야 나타나는 구원 같은 면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는 여자가 달리기 영화라고 주장하는 바.
아픈 몸은 말과 생각으로는 통제가 가능한데생활면에서는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는 기분에 빠지게 한다.생활반경이 자연스럽게좁아지고 근심 속에 자아 존재감도 지워지다 결국 온 세상이 통증 부위 하나로 귀결되는 억울함이랄까. 그러므로 우리는 작작 달려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고 해서 불가능해질 때까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는 건 중년의 위기가 저지를 수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절정 아니겠는가. 나에겐 새롭게 나를 받아 줄 아는 남자도 없고 여태까지 날이 갈수록 나아진 건 달리기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