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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류연재

자원봉사와 승부욕

by 준혜이

4년 전 남편이 동네 소년 축구팀 코치 자원봉사를 시작한 이유는 우리가 낳은 소년에게서 타고난 운동 신경이나 승부욕을 찾아볼 수 없어서였다. 아니, 그러면 운동을 안 시키면 되잖아. 하지만 그 시절 우린 이 동네에 새로 이사 들어와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온 가족이 사교적으로 무능하게 고립된 상태였으므로, 남편이 잘 알고, 좋아하는 축구만큼 우릴 사람 무리에 끼워 넣을 자연스러운 기회를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린 이 동네에 애들 축구로 정착했다.

학부모로 구성된 동네 축구 협회는 3학년으로 올라갈 애들부터 매해 여름 트라이 아웃을 실시해 트래블팀을 조직한다. 아이들 실력별로 나눠진 팀마다 제각기 부여된 팀명, 무슨 무슨 독수리가 있지만 우린 그 서열의 본질대로 A, B, C팀과 랜덤팀으로 부른다. 우리에겐 이렇게 냉소적일 자격이 있다. 우리 집 소년이 주로 랜덤팀에 소속되어 아빠의 의욕적인 코칭 아래 축구를 배워온 탓에. 하지만 올해만큼은 이전과는 다른 온기로 A, B, C팀을 호명한다. 우리 아들 B팀 됐어요. 동네 축구를 바닥에서 시작해 그 바닥에서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계속 똑같은 동네 애들과 경쟁해서 평가받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아빠가 축구 코치라서 얘가 얻은 혜택이 있다면 가기 싫어도 성실하게 거의 모든 축구 연습과 경기에 참여했다는 점이겠지.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6학년 남자애들로 이루어진 팀은 어느 동네 축구장에서나 남편을 쉬지 않고 고함치게 만들었다. B팀이라는 타이틀과 예전과 비교해 수준 높은 선수들의 축구 실력이 남편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기대했던 것보다 수준 낮은 선수들과 대충 해버린 듯한 리그 편성에 우리 팀을 늘 다섯 골 차 이상으로 이기고 마는 다른 모든 동네 축구팀에 적잖이 당황했거나. 소리 좀 그만 질러. 나에게는 아직 이길 거란 희망이 있어. 우리가 토요일밤마다 이런 대화 혹은 부부싸움을 벌일 때 다른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실 남편은 매주 경기가 끝난 후 우리 팀 한 소년 엄마 아빠에게 항의 이메일이나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남편은 그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같은 팀 선수들과 선수 엄마 아빠들의 불친절한 말과 행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애들과 어른들이 대놓고 그들을 공격한 건 아니어서, 네, 네, 잘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도리 잘하겠어요,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남편의 점잖은 대응에 더욱 분노한 듯한 그들은 결국 남편의 코칭 방식까지 흠잡아 동네 축구 협회에 온갖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잘잘못을 따져가며 해결하기 애매한 이런 일로 인해 타인들 사이를 오고 가는 예의 바른말과 글은 알고 보면 전부 그래서 뭘 어쩌라고, 아니겠습니까! 아닌가요…

그 애는 올여름에 이 동네로 새로 이사 왔다. 몇 년 전에 여기 살다가 다른 데로 이사 갔다가 다시 돌아온 거라고 하지만. 소년은 축구를 좋아해 동네 축구팀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고, 아, 여기서 이미 오래 살아버린 사람들은 애나 어른이나 뭐, 다 자기 살기 바쁘고. 아니, 이것은 4년 전 우릴 떠오르게 하는, 주인공만 바뀐 서사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납작 엎드렸고, 얘네들은 원하는 걸 당당히 요구했다는 거고, 자원봉사 축구 코치일 뿐인데 남편을 아랫사람 취급하면서. 과연 그 요구를 누가 제대로 들어줄 건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이 가족이 우리처럼 축구로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된다면, 야, 우리도 이제부터 협회장한테 항의하자. 뭔 소리야, 난 벌써 자주 하고 있어, 내일은 꼭 이길 거야. 그렇다면 정말로 이 세상은 그래서 어쩌라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거북하게 조율하면서 돌아가는 거니. 아님 동시다발적 손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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