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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샘 Aug 01. 2019

[서평] 소설 이슬라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는 시간. 무엇인가 명백하게 어긋난 시간.

김성중,현대문학,2018

 이슬라는 죽음을 잉태하는 신이다. 인간들은 제 몫의 삶을 살다가 생의 마지막 날에 죽음의 여신 이슬라가 낳아준 자식,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슬라는 공평하다. 단 하나의 예외도 소홀함도 없이 모든 생명에게 골고루 죽음을 낳아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운명을 저주하는 뱀 때문에 더는 죽음을 잉태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죽지 않게 된다.

죽음이 사라진 동시에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버린 백 년 동안 ‘나’는 열다섯 살에 머물게 된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불멸’을 꿈꾼다. 예술가라면 반 고흐의 그림이나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불멸의 작품을 꿈꿀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멸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에게 예고되지 않은 불멸은 혼란이고 고통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감옥이었다.

 그중에 한 장면이 가족들이 한데 모여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는 순간이었다. 숨을 거두는 모습까지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노인은 죽지 않는다.

 죽음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로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단념, 즉 죽음을 긍정하는 순간이다. 죽음이 현실이고, 현실이 죽음처럼 멀고 아득하다. 그 아득한 현실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할아버지에게 죽음보다 살아있는 현실이 더욱더 끔찍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가지지 못할수록 생생해지는 법이다. 노인은 죽음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영원한 건 결국 익사하게 되어 있어. 넌 이 세계가 얼마나 갈 것 같아? 다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클라우스처럼 자기만의 무덤을 찾게 될 거야. 영원에 지쳐서 말이야. 거리에 쓰레기처럼 굳어진 사람들 봤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유사 죽음 상태의 쓰레기들. 어떤 인간도 영원을 견뎌낼 순 없다는 증거들이지. 유사 죽음은 늘어나고 제정신인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그러다 멸종하게 될 거야.” 128쪽.


 소설 속 인물들은 앞으로 멈추게 될 시간이 백 년이라는 것을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이유도 알 수 없는 채로 백 억년 이상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 살다가 마침내 광기에 휩쓸려버린다. 도시 광장에는 ‘시체 나무’와 교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 나무에는 목을 매단 사람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고, 교수대에도 주검이 즐비하지만 전부 가짜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서 죽음을 흉내 내는 유희가 최신 유행이 된 탓이기 때문이다.


광장에는 ‘시체 나무’와 교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시체 나무’에는 목을 매단 사람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고, 교수대에도 역시 주검이 즐비하다. 물론 전부 가짜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서 죽음을 흉내 내는 유희. 난교와 폭동에 질려버린 대중의 최신 유행인 모양이다. 102쪽.

중독자들을 끌어들이던 펍들은 ‘고문실’로 바뀌어 있었다. 고문실에 들어간 손님들은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신체를 훼손할 수 있다. 살인자와 피해자라는 역할극을 하며 번갈아가며 상대를 유린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고문실은 한결같이 지하에 있는데 들어가면 종업원이 다양한 길이와 종류의 칼, 바늘, 밧줄, 총과 망치, 전기 도구들이 적혀 있는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종업원이 손톱을 뽑는 도구 중 중세의 교회 열쇠가 가장 유행이라고 귀띔해주었다. 나는 구경만 하고 나왔지만 에디는 기꺼이 실험에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시간 뒤에 데리러 가보니 에디는 성한 데라고는 없이 피갑칠을 한 채였다. “으, 끝내줘.” 넝마처럼 변한 살점은 붕대로 감겨져 있었지만 피가 계속 베어나왔다. 103쪽.


 나는 마을을 도망쳐 우연히 술사 이탕카와 소녀 아야를 만나게 되고, 훗날에 아야의 기억이 돌아와 죽음을 잉태하는 여신 이슬라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본래 자신이 되어 떠나는 순간부터 고정되었던 시간이 흘러가고 생명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무한의 인간은, 무한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유한한 인간만이 무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천장도 바닥도 없는 허공에 떠 있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다. 땅에서 태어난 인간은 하늘로 골아가야 한다. 하지만 죽음을 박탈당한 우리는 죽음과 비슷한 것들만 찾다 소모될 것이다. 129쪽.


 이 소설을 읽던 막바지에 ‘자유’와 ‘죽음’의 거리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떤 인생이든 결국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한한 불멸을 욕망하지만 반대로 죽을 수 없는 무한한 인간은 죽음이라는 자유를 욕망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 죽지 못하자 어떻게 해서든 죽음을 재현하는 인간들의 광기를 보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가장 극적인 자유, 일탈, 살아있음을 가장 강력하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로 느껴졌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라는 문장처럼 자유와 죽음 역시 동저의 양면처럼 가깝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죽지 않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견뎌야 할까.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시간은 결코 자유라는 해방이 아니다. 길들지 못한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죽지 못하는 공허함 속에서 처절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맞닥뜨리자 자유란 무엇일까,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품은 채로『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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