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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샘 Aug 01. 2019

[서평] 소설 그리스인조르바

춤추시겠소? 춤춥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열린책들,2018


조르바의 침묵 때문에, 영원하고도 부질없는 질문들이 다시 한 번 내 내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한 번 내 가슴은 고뇌로 차올랐다. 세상이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무슨 수로 우리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달고 세상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출하는 것이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 위에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기나 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걸까? 우리가 불멸에 대해 꺼지지 않는 갈망을 품는 것은, 우리가 불멸의 존재여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 어떤 불멸의 존재를 섬겨서가 아닐까? 


 내가 조르바를 만난 곳은 크레타 섬으로 가는 길 위에서다. 나는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고자 들뜬 마음으로 크레타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떠나기 전날 밤에 짐을 꾸리며 완성 시키지 못한 붓다에 관한 원고 뭉치를 바라보며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포장하여 가방 속에 넣는다. 나는 지식인의 삶에 강한 환멸을 느껴 책벌레와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을 하고 배에 올랐다. 그러나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중대한 결심을 뒤로 한 채로 가판대에 기대어 앉아 단테의 신곡을 펼치고 어느 편을 읽을지 망설인다. 연옥 편을 읽을지, 지옥 편을 읽을지 고민하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 나에게 선택과 자유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불길같이 강렬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주름투성이인 데다 벌레 먹은 나무처럼 풍상에 찌들어 보이는 60대 노인, 바로 조르바다. 그는 내가 크레타 섬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제안을 건넨다. 고민에 빠진 나에게 대뜸 머리를 흔들면서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저울을 가졌다며, 결정이란 눈을 꽉 감고 해버리는 거라고 하는 그 말에 그제야 나는 단테의 신곡을 조용히 덮는다. 

 소설에서 조르바가 산투르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에게 산투르는 길들일 수 없는 짐승이다. 우리가 손가락을 길들여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산투르 스스로 살아나서 자유롭게 노래한다. 조르바에게 춤은 언어화되기 이전의 언어다. 자신의 정열을 차분한 이성의 언어로 담아내는 대신 춤을 춘다. 손뼉을 치며 공중으로 뛰어올라 미친 듯한 도약을 반복하며 자연의 법칙을 이겨 내고 날아가고 싶은 영혼처럼 몸을 뒤흔들며 황홀한 정열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마음이 내키면 칠 거요. 또 노래도 할 거요.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추고.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36쪽)


 그에게 자유란 힘들게 쟁취한 황금 조각을 집어 들어 바다에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황금 조각이라는 정열을 품다가 마침내 자신의 정열을 사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자유. 과거에 조르바는 스스로 왼손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도자기 굽기에 한창 푹 빠졌을 때, 왼손 집게손가락이 자꾸 방해하며 신경을 돋우자 자른 것이다. 그는 고통을 너머 얻게 된 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그 고통 ‘너머’의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에로스’ 충동뿐만 아니라 죽음 충동이라고 하는 ‘타나토스’가 존재한다. 이 죽음 충동은 자살 충동 같은 파괴 충동과 다르다. 에로스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차원을 뛰어넘어 고통을 감내한 뒤에 얻을 수 있는 쾌락이 존재하기 때문에 타나토스라는 본능이 우리 안에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이슬라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죽지 못하자 죽음 충동이라는 광기에 휩쓸린 이유도 이 본능 때문이지 않았을까.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자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출하는 것이다.  


나는 급히 갈겨썼다. 붓다는 내 안에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나는 붓다가 상징으로 뒤덮인 푸른 띠처럼 나의 뇌에서 풀려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띠는 빠른 속도로 풀려 나왔다. 나는 따라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썼다. 모든 것은 간단, 극히 간단했다. 쓰는 게 아니라 받아 적는 것이었다. 자비와 체념과 공으로 이루어진 전 세계가 내 앞에 나타났다. 붓다의 궁전들, 후궁의 여인들, 황금 마차, 세 번의 숙명적인 만남(늙은 자와 병든 자와 죽은 자), 출가, 고행, 해탈, 중생 제도의 선포. 땅은 노란 꽃으로 뒤덮였다. 거지들과 왕들은 황색 가사를 입었다. 돌과 나무와 육신은 가벼워졌다. 영혼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정신이 되었으며, 정신은 무가 되었다. 손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머출 수도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환상은 살같이 지나가며 사라지려 했다. 나는 그 환상을 따라잡아야 했다. 


 나는 문명의 억압에서 벗어나 조르바와 함께 생활하며 마침내 붓다에 대한 원고를 완성한다. 내 안에 죽은 언어였던 붓다가 불멸하는 생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소설은 말한다. 우리가 불멸에 대해 꺼지지 않는 갈망을 품는 것은, 우리가 불멸의 존재여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그 어떤 불멸의 존재를 섬겨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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