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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Apr 22. 2022

P, 관광지의 마음

너는 고유해, 나는 그 고유를 사랑하고 - 3

지난겨울, 속초를 여행했다.      

 

사람들을 멀찍이 두고 걷다 롱패딩을 깔개 삼아 모래 위에 앉았다. 대낮의 겨울 바다는 적나라했다. 몰아치는 파도는 누구에게도 예뻐 보일 생각이 없는 듯했고 고요한 수평선 또한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전날 밤에는 속초 시가지를 걸었었다. 그곳은 막차가 떠난 직후의 기차역 같았다. 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생기가 없었다.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대부분의 상가가 닫혀있었고 그중 절반에는 임대 종이가 붙어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폭풍이 쓸고간 자리처럼 보였다. 한때는 활기가 넘쳤을지 모르나, 이곳저곳이 망가진 채로 자리하고 있는 시가지를 바라보며 사람이 빠져나간 장소는 이런 풍경을 갖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같은 겨울, 북촌을 여행했다.      


맑고 깨끗한 날이었다. 북악산과 한옥이 만들어내는 고즈넉한 풍경이 골목 사이사이로 펼쳐져 있었고 마을의 거의 모든 곳은 포토존이 되었다. 거리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반짝거리는 한복들이 사탕 껍질처럼 포스락거렸다. 사람들의 인생 사진에 누가 될까 봐 조심조심 앵글을 피해 걸었다. 한 걸음 가고 몸을 틀고, 또 한 걸음 가고 몸을 틀기를 반복했다.

 마을 내부로 들어갈수록 고고한 기와들 사이로 빨갛고 노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수막이었다.

    

 ‘북촌 한옥마을 주민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촬영을 자제해주세요’      


그런 말들을 바라보는데 여행이고 뭐고 당장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눈길도 아닌데 내딛는 자리마다 발자국이 푹푹 패이네, 그런 상상을 하며 사람이 너무 들어찬 장소는 이런 풍경을 갖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여행 후, 두 여행지의 풍경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사람이 들어찬 곳도, 빠져나간 곳도 훼손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있다.


P.

P와 나는 북촌의 한옥마을에서 영원히 헤어졌다. 나는 현수막을 발견한 이래로 P에게 줄곧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음을 은근히 내비쳤다. 하지만 P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그런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P가 가리키는 대문 앞에 어색하게 섰다. 햇빛이 안면에 강하게 내리쬐었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인상 좀 펴.'     


P가 말했다. 나는 그 상태로 돌아서서 해와 P를 등지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 후 P에게 온 연락들은 받지 않았다. 나는 거친 방식으로 P를 밀어냈다.     


P는 나를 좋아했고, 편해했고 동시에 재미있어했다. 그래서 자주 나를 찾았지만 P와 함께일 때, 그러니까 P가 나를 여행하던 때, 나는 훼손되고 있음을 느꼈다. 마치 북촌의 거리처럼. 그리고 P를 밀어낸 지금, 나는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느끼고 있다. 마치 속초의 시가지처럼.      


P에게 나는 관광지 같은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P와의 관계에서 내가 관광지가 된 것이 오로지 P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나를 적극적으로 관광지화했다. P가 나를 관광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표지판을 세우고, 가이드의 언어를 구사하고 포토존을 만들었다. 관광지의 마음을 자처하고도 괴롭게 견디고 있었을 때, 나는 말했어야 했다.


'나는 관광지가 아니야. 여기는 내 일상의 공간이야. 침을 뱉지 마. 쓰레기는 도로 가져가 줘. 사진 촬영은 정해진 곳에서만, 나는 모자이크 해주지 않을래. 또각거리는 구두 말고 운동화를 신고 와줘. 비닐우산 대신 가장 아끼는 우산을 쓰고 와줘. 그냥 지나치지 말고 머물러줘.'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지금 P가 여행하던 내 마음자리에는 한 상가 건너 한 상가 임대 종이가 붙어있다. P가 퉤, 하고 뱉고 간 가래의 자국과 꼭꼭 심어놓은 꽃들을 바라본다. 꽃들은 아직 시들지 않았다. 불 꺼진 쇼윈도에 전시된 마음들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무에게도 팔리지 못할, P에게 보여줬어야 했던 그 마음들을.


다시 P를 만난다면, 그 장소는 속초 바다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적나라한 바다 앞에서 그 바다와 꼭 닮은 모양새로 P와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함께 오래 해변을 걷고 싶다. 푹푹 패여도 훼손되지 않을 모래의 굴곡 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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