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 그 밤
너는 고유해, 나는 그 고유를 사랑하고 - 4
유현에 대해 쓰기로 하고, 흔적을 찾으려 블로그 일기를 읽었다.
사회 초년생에, 독립 새내기였던 그때의 나는 매일 밤 이를 꽉 물고 잠들어 잇몸이 내려앉던, 하루를 시작하는 게 무서워 누운 자리에서 울던 스물다섯이었다. 유현과 함께했던 독서모임은 그때의 나에게 가장 확실한 위로였다. 모임이 있는 주말만을 바라보았고 끔찍한 일도, 고진감래라며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런 나날들을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담담하게 읽다가 그때의 유현이 남겨둔 댓글을 발견했다. 급하게 뒤로 가기를 눌렀다.
겨울에 시작했던 모임에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찾아왔다. 유현은 다시 겨울을 맞기 전, 모임을 떠났다. 단체 대화방에 유현이 남긴 긴 글이 있었고, 유현이 방을 나갔다는 안내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와 있었다. 유현은 만들고 있던 문집에서 자신의 글을 빼 달라 했고, 마음 써 이어오던 모임을 갑자기 나가게 되어 미안하다 말했다. 이유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많은 날이 흐른 후, 유현의 급작스러운 떠남이 우리의 마음을 크게 할퀴지 않을 즈음 모임원들과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남은 우리는 다들 한 번씩 ‘혹시 나 때문에?’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모임은 유현의 힘으로 깊어지고 넓어졌었다. 한 서점에서 주최했던 독서모임에 참여한 우리에게는 4회라는 정해진 횟수가 있었지만, 유현은 '우리 괜찮으면 계속 볼까요?'라는 말을 꺼냈다. 바라 왔던 미래였으므로 다들 웃음으로 답했다. 모임원들은 모두 조심스럽고 조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나란히 걷다가 팔만 살짝 스쳐도 화들짝 놀라는, 그러나 그 접촉이 반가운.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친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유현이 있었다. 서로의 마음에 훌쩍 다가설 수 있는, 마치 팔짱을 걸어오는 듯한 질문들을 유현은 건넸고, 그 질문 덕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에 있던 애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유현은 걷기를 좋아했다. 그 덕에 우리는 오래 같이 걸었다. 온다 리쿠의 소설 <밤의 피크닉>에는 졸업식 전, 밤을 새워 80킬로미터를 걷는 ‘야간 보행제’ 이야기가 나온다. 설명만 들어도 마음이 움찔거리는 낭만적인 행사다. 밤을 새우진 않았지만, 우리의 걷기 또한 길고 길었으며 근사했다.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모임을 마치고, 서울역까지 걸었던 날이 있다. 8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비가 오던 오월이었고, 푸른 풍경이 빗물을 만나 더욱 선명했던 날이었다. 오래 걸으니 몸과 마음이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무슨 질문에도 답할 수 있는 상태라며, 진실게임을 하자며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지만, 의식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수 없어 겨우 웃기만 했었다.
유현이 그렇게 떠나간 게 나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얼마 전 산책을 하다가 깨닫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2년도 더 흐른 후였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유현이 건넸던 모든 것이, 남기고 간 모든 것이 내게 잘 맞는 옷처럼 포근한 것들이었다는 걸 잊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상처에 원망이 섞일 자리는 없었다. 다만 슬펐다.
유현을 이해한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유현이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건 집착에 가까운 마음이니까.
다만 유현이 남기고 간 그 밤을 오래 생각한다. 그 밤은 나의 것이기도 하니까. 그 밤에 유현이 내게 주었던 위로와 웃음을 모두 묻어두고 싶다. 그리울 때면 그 밤을 따라 걸으며 그것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잇몸이 내려앉은 입으로도 웃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도 아름다운 걸 볼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