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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May 13. 2022

환절기

너는 고유해, 나는 그 고유를 사랑하고 - 5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것 같다, 이미 좋아하고 있지만’ 

지난 4월의 일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봄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풀린 날씨와 만개한 꽃을 탓하며 조용히 시간을 죽였다. 감정을 방류하려 마주 앉아 웃는 얼굴에서 흠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볼수록 귀엽기만 해서, 바라보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항상 그 사람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왜 참는 거지?’

이유는 간단했다. 잃을까 봐. 달아오른 마음의 화기를 푸는 대가로 잃어버릴 수는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봄이니까. 지난봄이 길었다. 내가 가진 가장 빛나는 마음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내게 이해시켜며 그 봄을 보냈다. 섣부른 마음에 사람을 잃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하며.     


‘그 봄과 이 봄은 다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와닿지 않았던 말. 나는 여전히 나고 꽃도 여전히 꽃이라서, 특히 밤에 올려다보는 목련은 아득할 정도로 환해서. 이런 계절에는 마음이 달의 방식으로 빛나 착각이 잦다고, 그 빛은 내 빛이 아니라고. 그런 말을 되뇌며 꾹꾹 마음을 눌렀다. 

납작한 마음은 안전했다. 무방비 상태로 웃는 그 사람의 얼굴에 넋을 놓았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지워낼 수 있었다. 세차게 비가 내리던 밤, 깜깜한 현관에 서서 우산에 붙은 꽃잎을 한 장씩 떼어냈다. ‘무사히 봄을 보냈어’ 내게 이해시키며.     


‘만져보실래요?’

초여름을 지내던 한 날, 그 사람과 밤 산책을 하며 손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손이 따뜻한 편이라고 말했고 나는 단번에 그 손이 잡고 싶어졌다. 여름이 왔는데도 왜 이럴까, 당황하여 손이 그렇게 따뜻할 수 있냐는 이상한 질문을 건넸다.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며 만져보실래요?라고 물었다. 꽉 움켜쥐고 싶었지만, 봄에 가졌던 마음을 들킬까 봐, 그보다는 그 마음이 돌아올까 봐 스치듯 손을 건드려보고 무심한 척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나는 그 마음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돌아옴은 떠남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 마음은 떠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꽉 움켜쥐지 못했던 그 사람의 손이 하얗게 떠올랐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사람과 가끔 산책을 했다. 밤에 하는 산책이 좋았다. 말을 고르는 얼굴을 훔쳐볼 수 있으니까. 언젠가 썼던 소설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특히,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쉼 없이 내려앉는 봄의 무게에 못이긴 것일 수도 있고, 나의 욕심이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평생 볼 수도 있을 사람을 멀리 보내버리는 일일 수도 있겠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함께 딛는 걸음이 쌓여갈수록 마음이 한 겹씩 포개져 결을 같이했다. 천천히 쌓여가는 느낌. 그 마음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여름이니까’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문자를 보냈다.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다짐은 없었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아 말들이 줄줄 새듯 흘러나왔다. 약한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려운 말들을 뱉어내니 마음이 편했다. 더 듣고 싶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그 사람에게 다른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여름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좋아한다고, 명백하게 좋아한다고.      


나는 여전히 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여름이라는 것. 

그 사람이 여름의 나무를 닮았다는 것.      


그 사람은 여름의 나무를 닮았다. 직사광선도 푸른 잎으로 틔워낼 것만 같은 한 아름의 나무. 빛에 포위된 채 바보같이 흐드러진 나무.      


그 사람의 손을 오래 잡아보았다.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박소란, <정다운 사람처럼> 시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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