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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품쟁이 May 13. 2020

[1화] 얼마면 돼?

원빈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는 까칠하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여러 프로를 종횡무진하는 MC였다. 번역하면 예민하고 변덕스럽고 심지어 싸가지도 없지만 '모셔야' 하는 MC라는 것이다.


사실 해보나마나 까일게 뻔한 섭외였다. 우리 프로는 돈이 없고, 돈이 너무 없고, 돈이 진짜 없어서 원고 프린트도 다 쓴 토너를 쉐킷쉐킷 흔들어 쓰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꿈까지 가난해서야 되겠는가. 나와 후배작가들은 야심차게 MC 섭외 리스트를 작성했고 이상적인 콤비 조합도 짜봤다. 행복했다. 즐거웠다. 설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꿈은 섭외 스타트와 동시에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금액은 좀 힘들거 같아요 작가님" 

"아니에요. 많이 못드려서 저희가 죄송하죠..."


"내부적으로 논의해봤는데 아무래도 어려울거 같네요" 

"예에... 다음에 더 좋은 프로에서 좋은 자리로 모실게요..."


"최소 이 정도 페이는 맞춰 주셔야 할 거 같은데 안 되실까요?"

"(우는 소리) 저희가 진짜 맞춰 드리고 싶은데 지금 제작진 페이도 안 남는 상황이라서요."


"혹시 정 그러시면 1+1 어떠세요? 우리 애 중에 게스트로 진짜 괜찮은 애 있는데"

"(하하;;) 저희가 게스트 쓸 돈이 어딨어요. 엠씨 줄 돈도 없는데... 근데 1+1이면 얼마에요?" 


돈 없어서 서러운거 슬프지만 익숙하고, 돈 없어서 까일 거 서럽지만 예상한 일이었다. 에잇, 치사한데 욕할 것도 없다. 작가나 연예인이나 다 파리목숨 프리랜서인거 마찬가진데 물 올랐을때 노젓는 거 당연한 거다. 몸값 오를 때 불러야 한다. 그러니까 돈 안 되서 안 된다고? 그래, 싫음 말라 그래! 호기롭게 who's next? 를 외쳤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더니 어느새 훌쩍... 첫방 날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맙소사. 이대로라면 녹화연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좀 낮추죠." 

다급한 피디는 MC 급을 낮춰보자는 거였는데 

"***어때요?" 

나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문제의 그 MC 였다.


"***요? 될까요?"

"얼마 전에 하던 거 끝났거든요. 혹시 모르니까 해보죠." 


그 순간 나는 방송작가로서의 경험치를 깡그리 잊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실패 99%) + 해보죠(삽질 1%) = 100% 안 될 헛짓을 대체 왜? 불행하게도 리셋이 특기인 나는 기어코 하고야 말았고, 당시 그가 소속사 없는 FA상태였다는 건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이 말인 즉, 매니저가 없으므로 본인에게 직접 연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라는 프로 ***작가라고 합니다. 저희 프로는 (블라블라블라)...."


최대한 밝게, 나는 당신을 무지 좋아하는 팬이며 당신을 대신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에 우리 프로를 꼭 해주셔야하고 맡아주신다면 더 없을 영광이겠다는 말을 주르륵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페이는요?"


예상질문은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그래, 돈 중요하지... 우리가 슈돌도 미우새도 나혼산도 아닌데... 까놓고 솔직하게 말해야하는 타이밍이 온 것이다.


"정말 죄송하지만 금액은 ** 정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네?"


피식, 그가 웃었다. 자동으로 자막이 떴다. [맷돌 돌리려는데 손잡이가 빠졌네? 어이가 없네?]  나는 진심으로 송구했다. 날로 먹으려는 양아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붙잡고 싶었다. 간절한건 나니까.


"정말 죄송해요... 저희가 예산이 워낙 적어서..."

"내가 얼마 받는지 알아요?"

"아, 예... 저희도 최대한 맞춰드리고 싶은데..."

"그럼 최대 얼마요?"

"저희가요, 다른 프로보다 녹화도 짧고 리허설도 없고 당연히 시간 맞춰드리고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 정도면 어떠실까요?"

"알아본거 맞아요?"

"네?"

"모르는 거 같은데?"

"뭐를..."

"내가 얼마 받는지 아냐구"


그래, 돈 많이 못줘서 미안하고 거절하는 거 이해한다. 하지만 거절에도 매너가 있잖니. 가는 말 고왔는데 오는 말은 어디다 싹둑 잘라먹었냐. 그래서 얼마면 되는데? 얼마면 되겠니? 얘기나 해보자, 응?   


"얼마면 돼요?"

"뭐?"

"얼마면 되냐구요!"

    

속으로 한 말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속엣말이었는데 이런 씁... 그는 분노하며 전화를 끊었고, 통화는 몇 분이었는데 그 후폭풍은 몇 주를 갔다. 그는 자기가 아는 작가들을 총동원해 내 욕을 하고 다녔고, 건너 건너 건너 마침내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역시 성공한 사람은 열정이 남다르다. 집요하게, 끈기있게, 성실하게 나도 몰랐던 내 싸가지를 널리널리 전파한 것이다. 그 열정 인정하마. 지금처럼 앞으로도 쭉 잘먹고 잘살아라. 돈도 많이 버시고요.  


그는 몰랐겠지. 내 기도는 99.9% 이뤄지지 않는다. 분명 복을 기원했는데, 그 후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출연이 뜨문뜨문해지더니 어느날 돌연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그래서 통괘했냐고? 전혀... 사실, 진심으로 후회했다. 화나도 "얼마면 돼?"는 하지 말걸. 그리고 그 업보는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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