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여, 경제력은 가졌는데 어찌 경제권은 갖지 못하는가. 당신의 돈이 당신에게 향하지 않는 순간 돈은 곧 독이 된다. 돈을 쓸 수 있는 능력이 곧 경제력이다. 남자가 돈은 벌지만 돈을 쓸 능력은 없다는 것은 곧 돈이 되지 않다는 뜻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 전반 모든 영역에서 여성적인 것이 당연하고 바람직하고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돈이 되는 것은 권력이 되는 게 자본주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이여, 제발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좀 말아라. 대중적인 선호도에 따를수록 관계를 맺는 여자들이 많아진다고? 그렇다면, 제발 본인이 만나는 여자는 다른 여자와 낫거나 차별화되기를 바라지 마라. 그건 이율배반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본인은 대중성을 쫓지만 상대에게는 대중성 그 이상의 탁월함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나갈 때마다 비슷하게 입고 꾸미고 말하는 앵무새 같은 사람들 속에서 쉽게 대체되지 않느냐. 본인의 고유한 색깔과 향기를 지니는 첫 번째 방법은 자신의 멋과 매력을 '어떻게 하면 여자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좋아하는 상대방을 위해서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과 이성으로서의 무기는 반드시 스스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너는 내가 감정적으로 대해도 같이 화내지 않고 잘 들어줘서 좋아서 참 듬직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본인 스스로를 이해심 많고 듬직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근데 남자들아 우리 사실 지금 너무 힘들다. 사회인으로서 한창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돈을 벌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근데 그 돈이 돈을 벌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 우리 개개인이 노력하면 될까? 아니면 초식과 절식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를 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면 되는 것일까? 여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기 폭력을 자행하면 그것이 진정 남자답게 사는 것일까?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대한민국의 현실은 초국가적 절망 상태에 직면하고 있다. 블루칼라 직종은 이민자와 경쟁해야 하고 화이트칼라는 이미 AI에게 일자리를 위협받는 중이다. 베이비부머가 집단 은퇴하게 되는 시점부터 늘어나는 연금 부담과 동시에 고액 자산가와 기술 인재들의 이민 행렬은 더욱 극심화 되어 적당히 보통의 평범한 필자 같은 남자들은 국가 존폐의 위기에서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 남자들은 스스로를 들어 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근데 두 발 딛고 서있기도 버겁다. 집단과 사회와 국가를 고민하는 게 사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만 생각할수록 나를 둘러싼 세계의 위험과 모순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모순과 위험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 정반합의 발전의 소용돌이에 스스로를 맡겨 놓을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그럴 수 없다. 우리 남자는 지금 당장 직면한 위협으로부터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사람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1순위이어야 한다. 내가 내 한 몸을 지키는 방향이 아니라 종족 번식 능력의 억제와 퇴화를 스스로 자행하는 우리 대한민국 남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보통 여기까지 문제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는 유혹 중 하나가 여자를 비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여자를 적으로 간주하면 안 된다. 남성과 여성의 권리 증진은 제로섬 게임이 아닐뿐더러 남자에겐 여자가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학설이다)
만약 남자가 남자와만 관계를 형성하고 집단 내에서 생존하게 되면 끊임없는 경쟁이 발생할 것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승자는 소수인데, 대다수의 패배자 남자들이 힘을 얻고 살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내가 지켜야 하는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켜야 한다는 그 마음만이 오로지 남자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남자는 이대로 가다가는 비극의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인생을 파괴하고 있는 남자들이 너무나 많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필자는 한국의 미래를 디스토피아적으로 전망하고 있으나 여전히 기대가 있다. 이러한 기대가 현실이 되도록 단순히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생계 이외에 무엇인가 소명의식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필자에게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를 구하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서 오늘 제안하고 싶은 단어, 바로 자기력이다.
일본에서 '여자력'이라는 단어가 부상한 것처럼, 지금 우리 젊은 남자들에게 필요한 건 '자기력'이 필요하다.자기력과 자기다움은 다르다. ~답다의 명사형인 '다움'은 앞의 대상이 성질이나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자기력의 뜻은 중의적이다. 자신은 '자기다움'의 '자기장'이 발생하는 장소다. 즉, '자기력'은 자기다움을 근거로 타인을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이때 무게중심은 '타인'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에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력에 타인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인간은 혼자 존재할 때,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단순히 타인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만이 '자기력'을 칭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반대하지만 본인 스스로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한다거나 세상이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도 무엇인가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 그것이 곧 자기력에 가깝다. 특히 남자는 꼭 자신만의 자기력이 필요하다. 여자친구, 와이프, 주변 사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남자는 자기력을 잃게 된다. '자기장 (Magnetic Field)에서 같은 극끼리는 서로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기력을 갖기 힘들어할까? 누구나 원인은 알고 있다. 타인의 평가 기준을 내재화하는 것. 바로 비교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본인들의 남성성에 근거한 자기력을 형성하기가 특히 어려운데 그 이유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바람직한 남성 모델과 그로부터 갖춰야 할 준거체계의 붕괴를 겪었기 때문이다. 쉽게 얘기해서 한국의 치맛바람, 대치맘, 미국의 사커맘(헬리콥터맘) 등의 모성 중심의 미취학 교육부터 초등학교 (2022년 기준, 한국 초등학교 교사의 약 80%가 여성이다) 교육 때 대다수의 남성은 여성의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상식적으로 여교사가 절대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아들, 그리고 우리 남자들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느 사회든, 한쪽의 성별이 절대다수의 집단이 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수많은 남초/여초 집단의 문제점을 떠올려 보라)
반대로 우리 사회의 딸바보를 자처하는 스윗남들의 만연화도 문제다. 진짜 아버지의 역할은 자식이 성인으로서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적정선을 그어주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배려와 응원, 보호를 제공하는 경우 말 그대로 딸은 바보가 된다. 그런 딸들이 바보가 되어버리니까, 특히 결혼을 앞두고 아무리 남녀가 비슷하게 돈을 벌게 되어도 여전히 남자에게 바라는 게 기본값이고 동등하게 돈을 내면 본인은 깨어 있는 사람이고 돈을 더 내는 것 같다고 느끼면 억울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20살 어쩌면 그 이전부터 30대를 접어들 때까지 10년 넘게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 남자들이 자기력을 제대로 갖기 어려운 이유는 언론에 비치는 남자 정치인들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운동권 했다는 것 하나로 사회에 생산적인 기여도 별로 없이 그 후 자그마치 수십 년간 자기 손으로 돈 벌고 열심히 사는 대부분 시민 위에 도덕적으로 군림한 운동권 정치인들의 지분이 크다.이들의 존재는 여성이 여전히 한국 남자에 대한 인식의 왜곡이 발생하게 되는 큰 이유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국회에 절대다수이고 여성을 무시하는 행위를 일삼아 오며 정치권력을 차지하면서 경제력도 갖춘 역설적으로 여성이 원하는 남성상을 갖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치권력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이상 우리 젊은 남자들의 처우와 현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는 작금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남자가 남자로서 자신만의 '자기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이야기해볼 것이다. 스스로를 설거지의 대상으로 규정하여 자신이 처한 모순과 비관적인 현실을 이론화하여 설명한들 달라지는 것은 왜곡된 성관념밖에 없다.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사람만 타인을 바꿀 수 있다. 남자의 행복에 관심 없는 사회에서 진정 남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력'으로 무장한 대오각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