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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기부기 Jul 04. 2024

나의 topophilia

같은 장소, 다른 느낌

나는 장소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특정 장소를 떠올리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이따금씩 그 곳을 가보고 싶어진다.

가서 그 곳에서,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내 인생을 짧게나마 돌아보는 순간이 감격스럽고 좋다.


나에게 topophilia(장소애)를 일으키는

세 곳을 소개하겠다.


1. 나는 현재 대학의 교직원으로 재직중이다. 교직원의 강력한 메리트 중 하나가, 도서대출권이다. 대학 도서관은 모두가 알다시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분야/출간시기 상관없이 어떤 책이라도 볼 수 있는 초대형 서점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엄청난 혜택을 재직중에 최대한 누려야 하기에, 나는 방학이 되면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도서관을 부지런히 드나든다. 도서관을 갈 때 마다 느껴지는 책의 냄새와 공부하는 학생들의 진중한 분위기는 늘 마음을 안정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도서관을 나오면서 꼭 보게되는 열람실의 낡은 문짝이 있다. 그 문을 열고 2009년 겨울, 지금의 학교(: 재직 중인 학교, * 모교는 다른 곳임) 입시를 위한 논술고사를 보러 들어갔었다. 아마 그 때, 지금은 나의 직장 선배님이실지도 모르는 분께서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셨을거고, 같이 오셨었던 아빠는 교정을 둘러보며 딸이 이 학교에서 공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을거다. 학교로 들어오기 전, 정문 옆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 드시던 아빠의 모습이, 도서관 열람실 문짝을 볼 때마다 강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학교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내가 스스로 대견하다.


2. 취직한지 1년 반만에, 업무상 영어를 많이 써야하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나는 부랴부랴 영어 회화 연습을 시작했고, 방법은 스터디었다. 주말마다 모여서 영어 회화를 하는 스터디 그룹에 들어갔는데, small talk부터 debate까지 다양한 주제로 자유롭게 진행하였고, 대화를 통해 멤버들의 실력과 성격이 모두 훌륭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구성은 대부분 직장인/취준생이어서 스터디 이후의 뒷풀이가 빠질 수 없었다. 그냥 소통보다 음주 소통을 더 선호하는 나는 당연히 매번 뒷풀이에 참석했는데, 2차로 갔던 곳 중 하나가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버렸다. 상수동에 있는 앤티크한 느낌의 바였는데, 입구에서부터 훅 느껴졌던 달달하고 스모키한 향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 곳을 알려준 그 날의 멤버들이 그 곳에서 여러 종류의 위스키를 소개해주었고, 싱글몰트 위스키의 매력에 빠진 나는 이후로도 위스키바를 자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 때의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출산을 하고 그 해 내 생일에 남편에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여 함께 갔다. 아기 엄마가 되어 남편과 함께 방문한 위스키 바는 시간이 지났어도 지난 날의 향과 멋이 그대로였다. 남편도 그 곳의 분위기를 참으로 맘에 들어 했고, 함께 마셨던 술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이 집은 칵테일북을 아름다운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제작하여 시그니처 칵테일들을 소개하는데, 첫 장이 우리가 차로 여행하며 즐겨 들었던 재즈가수인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모티브로 만든 칵테일이었다. 검붉은 와인색 비주얼에 진한 피트 위스키의 향까지 느껴지는 이 칵테일의 첫 모금은 너무나 완벽했다.)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해, 당시 모유수유 중이던 나는 그날 만큼은 봉인 해제를 하고 육아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털어버렸다. 지금도 그 곳은 아껴두었다가, 기념일 혹은 축하받을 날을 핑계로 남편을 데리고 갈 나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위스키와 칵테일로 적셔졌던 (초보) 아기 엄마의 생일 전야


3.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결혼까지 하게 된 근거지가 연남동이다. 나는 당시 연남동에 살았고, 우린 동네에서 매일 데이트를 했다. 사실 동네 자체가 우리의 추억과 애정이 담뿍 담겨있는 곳인데, 그 중에서도 특별한 장소가 두 곳 있다.

첫 번째는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프랑스식 포차'. 남편과 처음 만난 날, 저녁을 먹은 곳이다. 당시 우리는 첫 만남에 대화가 너무 잘 통해 그 곳에서 와인 2병을 부시고, 3차까지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처음 만난 그 날,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 사람과 결혼하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장소, 시끌벅적한 골목 지하에 위치한 어느 '이자카야'다.  그 곳에서 남편과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상하게 그 곳만 가면 남편이 더욱 잘생겨 보였다..) 남편과 소원 내기를 해서 궁금했던 남편의 숨겨진 모습을 캐보기도 했었다. 지난 주 아이가 시골 부모님댁에 내려가 있는 동안 남편과 함께 다시 그 곳에 갔는데, 사방에 젊고 풋풋한 남녀들이 가득했다. 과거 앉았던 '우리자리' 근처에서 술을 마시며 남편은 "이 중에서 결혼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거야~"라며 흡족해했다. 다찌석 내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던 과거의 남편도, 지금의 남편도, 술집의 아늑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너무 멋져 보였다.



애정하는 장소들을 나열해보니, 술에 관한 장소가 많구나.

이로써 나는 술을 마시며 기쁨을 얻는 애주가(실제는 알.쓰.)임을 다시 확인한다..

사실 중요한 건,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사람과 그 날의 분위기, 그 곳에서 받았던 영감이다.

그 곳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언제든 다시 가보고 싶은 그 곳을 떠올리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곳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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