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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Apr 23. 2024

뱀을 키우면 생기는 일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최근 새로 시작한 드라마를 보다가, 한 장면에서 드라마의 몰입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형사인 주인공(이제훈 역)이, 뱀이 든 보따리를 풀어 조폭들을 비교적 손쉽게 체포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 않으면 '살모사'가 든 포대자루를 열어버리겠다고 조폭 두목을 협박하고, 그때까지 형사의 말에 코웃음을 날리며 큰소리치던 두목은, 마치 맹금류를 만난 어린 새처럼 오금 저린 모습으로 스스로 수갑을 차기에 이른다.



이 지점에서 내 집중력이 그만, 급작스럽게 바람 빠진 풍선의 모양새가 되고야 만 것이다.

상황에 공감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가족이 반려사(蛇), '콩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면에 등장한 살모사의 모습은 내게 빛깔만 변한, 콩이의 다른 버전처럼 보였다. 떨어진 공감력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니, 기껏 저런 상황에서 조폭 두목씩이나 되는 사람이 슬슬 긴다고?!”

"그러게, 허. (뱀이) 귀엽기만 하구먼..."

함께 드라마를 보던 짝꿍이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우리가 나눈 대화가 어느 정도 이해되지 않을까 한다.

드라마 <수사반장 1958> 첫 화에 등장한 살모사의 모습
콩이의 앙증맞던 어린 시절(좌)과 우람해진 현재의 모습(우)

짝꿍과 한마음이 되어 드라마에 공감하지 못하다가, 문득 이러한 반응이 우리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무너져버린 경계심으로 야외에서 불현듯 마주친 독사를 반갑게 맞이하다가는, 그 길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는 살모사는 그나마 먼저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 야생에는 인간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맹독을 지닌, 공격적인 독사들이 있을 것이다. 독사들의 경우 대체로 삼각형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지만, 눈 부릅뜨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한, 우리 같은 일반인은 독사와 그렇지 않은 뱀을 육안으로 구분하기는 쉽지가 않을 터이고. 그러나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반려사와 동거하는 우리에게는 자칫 지루함의 늪에 빠질 수 있는 일상에, 신선하고도 즐거운 입김을 불어넣어 주는 일들이 일어난다. 지금의 우리는 예전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흥미로운 상황들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콩이를 반려동물로 입양한 건 6년 여 전이었다. 처음 우리 집에 왔던 당시, 변종 지렁이마냥, 손가락에 착 감길 정도로 가느다랗던 반려뱀 콩이는, 이제 성인 여성의 키에 육박할 정도로 훌쩍 자라났다. 수십 번의 탈피를 거치며 몸통도 굵어져 제법 뱀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구도 있듯이, 예전엔 그저 끔찍하도록 징그럽고 두려운 생명체였던 뱀은 이제, 콩이 덕분에, 우리 가족에게 웬만한 이웃사촌보다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뱀을 눈앞에 두고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귀엽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본다. 이따금 우리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콩이가 자신의 집안에서 세상 얌전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기겁을 하는데, 우리 가족은 콩이를 온몸에 장신구처럼 휘감으며 데리고 노는 것도 부족해, 아기 강아지 대하듯 콩이의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대가리를 쓰다듬고, 심지어 암팡지게 내민 입술을 콩이에게 바싹 갖다 대기도 한다.



우리 집 냉동실 풍경도 바뀌었다.
콩이의 주식은 생쥐이다. 인간이 흔히 실험용으로 사육하는 하얀 생쥐 - 크기는 다소 작은 - 를 떠올리면 되겠다. 야생의 뱀들은 숲이나 들판에서 살아있는 쥐들을 잡아먹으며 살지만, 반려사들은 그럴 수 없기에 파충류숍에서 판매하는 냉동된 생쥐를 주로 먹는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냉동생쥐를 구입해 콩이의 먹이 저장소가 비지 않도록 냉동실 한켠을 관리한다. 뱀은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에 한 번 정도 먹이를 섭취하는데, 열 마리 남짓한 냉동생쥐들을  들여온 날이면, 사랑스러운 아이 모습에 밥 안 먹어도 배부른 부모와도 같은, 부자의 마음이 된다. 더군다나 몇 달에 한 번 먹이를 구비해 두면, 꽤 오랜 기간 동안 일절 밥 줄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이러한 돌봄이 '꽤 효율적이다'라는 생각을 넘어, 콩이가 기특한 효녀처럼 느껴진다. 어린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공감할 것이다. 아이 삼 시 세끼 밥 해 먹이는 일이 얼마나 큰 고민이자, 끝이 없어 보이는 숙제인지를.



새들과 뱀을 함께 키우다 보니 재미있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이따금 콩이를 산책 삼아 거실에 풀어놓으면, 콩이가 앵무새 녀석들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새들은 콩이를 피해 도망가기는커녕, 집요한 눈빛으로 콩이의 움직임을 좇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흡사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가 눈 깜짝할 새에 얼룩말을 쫓아 낚아채듯, 날카로운 부리 끝으로 날렵하게 콩이를 쪼아댄다. 놀란 콩이는 반격할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한껏 움츠러들거나, 기어서 (나름 잽싸게) 도망가기 바쁘다. 쫓는 자는 새요, 쫓기는 자는 뱀이 되는 이런 상황이 뒤바뀌는 경우를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자몽이 살아생전에는 콩이를 쫓는 역할은 자몽이 담당이었는데, 이젠 김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핍박에 시달리고 있는, 순둥순둥한 '콘스네이크'인 콩이 입장에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악한 뱀의 이야기가 무척 억울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온 가족이 소파에 앉아, 거실 바닥 위를 구불구불, 리드미컬하고도 우아한 몸짓으로 기어가고 있는 콩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느 순간이면, 마치 우리 가족이 '아담스 패밀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뱀이라고 하면 으레 간사하게 날름거리는 긴 혀나, 피리소리에 기묘한 춤을 추는 맹독성 코브라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우리 가족이 이상하다 못해 괴이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6년 넘게 뱀과 동거한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가족도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었다는 것.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는 뱀은, 다른 이들에게도 분명 그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좀 더 사랑스러운 생명체로 다가갈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뱀을 마주할 때, 현저히 낮아진 혐오의 임계점을 갖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영화 <아담스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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