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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Mar 23. 2024

더듬이 - 2

부제: 고시원 블루스

바퀴벌레에 대한 내 지독한 혐오는 어린 시절 우연히 보게 된 한 영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홉 살 무렵이었다. 유난히 덥고 습했던 그해 여름, 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채, 형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부모님이 어디 계셨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형이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형이 내뱉었던 말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텔레비전에서 핵폭탄 실험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핵폭탄이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관한 실험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새까만 바디백(Body Bag) 가득 하얗게 살이 오른 돼지들을 산 채로 담아 넣고, 실험 지역 부근에 위치한 집 안 어딘가에 묻었다. 나는 직감했다.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돼지를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곧이어 화면 속에서 폭탄이 굉음을 울리며 터졌고, 거대한 회색빛 버섯구름이 끝도 없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 순간 눈을 감았던 나는, 이후 돼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지 못했다. 형이 감탄하며 소리치던 말만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 이야, 멋지다!!

  사람들이 만든 폭탄에 돼지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 순간에 형은 그렇게 외쳤다. 감탄을 쏟아내는 형의 그 목소리가 내게는 몹시도 기이하게 들렸다. 텔레비전 속 섬뜩했던 회색빛 잔상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았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에야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그때의 공포스러웠던 느낌이 다시 떠오른 건,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코앞에 둔 수업 시간에서였다.

활짝 열어둔 교실 복도 쪽 창문을 통해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더위를 가시게 하던, ‘파르르르' 소리와 함께. 조용했던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복도 쪽 가까이 앉아있던 4분단 여자아이들이 가장 먼저 괴성을 지르며 의자 위로 튀어 올랐다. 두려움에 찬, 절박한 움직임은 곧이어 쓰나미처럼 3분단에서 2분단으로, 그리고 내가 속한 1분단까지 밀려왔다. 그때쯤엔 남자아이들까지 야단법석을 떨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선생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교실은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 의자가 넘어지며 내는 소음, '잡아!'라고 외치는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바퀴벌레를 본 아이들뿐만 아니라, 바퀴벌레의 더듬이 한쪽도 보지 못한 아이들까지 두려움으로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들려온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아홉 살 여름, 폭발하는 원자폭탄을 보며 '멋지다'라고 외치던 형의 들뜬 목소리처럼.


  - 원자폭탄이 터져도 살아남는 게 바퀴벌레지만,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반장 녀석이었다. 반장은 자신의 실내화 바닥 아래에 찌부러진 바퀴벌레를 내보이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 나는, 죽일 수 있어!

  여자아이들의 관심과 환호가 녀석에게로 향하던 그때, 내 마음속에선 징그럽도록 생명력 질긴 바퀴벌레만큼이나, 의기양양한 반장의 면상에 혐오감이 일었다. 나는, 그 어떤 생명체도 남아있지 않은 지구를 새까맣게 뒤덮고 있을 무시무시한 바퀴벌레 떼들이, 반장의 얼굴을 빈틈없이 뒤덮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만들어낸 섬뜩한 광경에 온몸의 솜털들이 돋아나곤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빽빽한 어둠이 반장의 하얀 얼굴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순간은 이후에도 내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아파트로 이사를 온 이후에야 나는 그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내 인생에 불현듯 끼어든 목소리 하나로 다시금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잠시 후, 현실인지 꿈속인지 분간도 못한 채 눈만 끔벅이던 내 귓가로 옅은 바람 소리가 스쳐 갔다. 이윽고, 바람을 일으킨 그것이 내 턱 위로 떨어져 내려왔다. 이제 그것과 나 사이에는 솜털만큼의 거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 대답을, 듣고 싶은데?

  분명, 그것이 말을 하고 있었다. 더듬이를 리듬감 있게 살랑이며. 별안간 물속에 있는 듯 눈앞이 희미해졌다. 나는 오른손으로 슬그머니 옆구리를 꼬집어보았다. 옆구리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주사를 한 대 맞은 듯 턱 한가운데가 따끔했다. 녀석이 내 턱 깊숙이 주둥이를 꽂아 넣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손을 높이 치켜들어 턱 쪽을 향해 힘차게 날렸다. 눈앞이 번쩍하며 턱 끝이 아렸다. 나는 찌그러진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며 손을 들어 눈앞에 펼쳐보았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 허튼짓하지 마. 그렇게 해서 나를 없앨 수 없으니까.

  녀석은 이제 내 코끝에 올라앉아 있었다.

  - 난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내뱉는 '친구'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 우리가…?

  내가 되물었다.

  - 그래, 이제 우리는 친구가 된 거야. 네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건….

  녀석이 더듬이를 빠르게 휘저으며 말했다. 녀석의 목소리와, 더듬이 끝에서 감지되는 공기의 흐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위력을 느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 3에서 계속


3~5편은 다음 주 중, 하루에 한 편씩 올리겠습니다.

다들 편안한 봄날의 주말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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