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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Mar 26. 2024

더듬이 - 3

부제: 고시원 블루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때때로 나는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거나, 불쑥불쑥 감정이 끓어오르곤 한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나보다 앞서 나가는 것 같은 친구들, 성실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형을 볼 때마다 중학교 1학년 여름의 감정이 떠올랐다. 심지어 전 여자 친구이자 이제는 여자 사람 친구인 소정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이따금 소정과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즉흥적으로 잠자리를 가진 후, 쏜살같이 방을 나서는 그녀의 등을 보면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 오빠, 얼굴이 점점 썩고 있어. 요즘 내가 보는 좀비 드라마에 나오는 좀비 같아. 너무 무리해서 공부하는 거 아니야?

  어느 날, 함께 밥을 먹던 소정이 말했다.

 - 그것이 썩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네.

  나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거리며 장난치듯 아랫도리를 흘끔거렸다.

 - 멀쩡한 것 같은데, 그 사람보다는….

  소정은 아무렇지 않게 전 남자 친구인 내 앞에서 현 남자 친구를 언급했다. 아래로 시선을 향하던 소정의 입에서 피식,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멀쩡하다’라고 말하는 소정의 말과 달리, 소정의 웃음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모멸감이 느껴졌다. 무엇인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 했고, 나는 물 한 모금을 삼키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소정에게는 새 남자친구가 있다. 물론, 나보다 경제적으로 잘 나가는 놈이다. 따박따박 나오는 고급진 월급이, 서울 한 복판에 집 한 칸 마련해 줄 든든한 배경이 있다. 소정의 말에 따르면, 남자구실이 그녀의 성에 차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소정은 그 자식과 헤어질 생각이 없다. 내게 ‘쿨하게 헤어지자’ 말하며, '좋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고 하던 소정이.

나는 소정의 뒷모습에서 그 빌어먹을 자식의 얼굴을 본다. 나는 알고 있다. 소정의 등보다 더 보고 싶지 않은 건, 그 순간의 내 표정과, 남자로서 달고 있는 상징적 자존심 따위 가벼이 압도해 버리고 마는 그놈의 자본력이라는 것을. 소정의 뒷모습이 싫어지는 것만큼 그녀와의 만남도 드물어지고, 나는 일차적이고 절실한 욕구마저 내 손으로 해결하며,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나타난 이후 내 일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단지 내 옷차림이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 나와 함께 하면 너의 삶이 달라질 거야.

  그것이 말했다. 내 삶이 달라지리라는 녀석의 말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를 홀렸다. 고문 같은 희망 말고는 그릴 것이 없던 내 미래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다가왔다. 누군가는 나를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며 경멸의 눈빛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하다. 원래 인간이란 자신이 납득하기 힘든 것들과 될 수 없는 것들을 멸시하기 마련이다.


  그날부터 나는 주머니가 달린 옷만 입었다.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화장실에 가고, 고시원 근처에서 산책을 돌고, 심지어 밥을 먹었다. 처음 다소 찝찝했던 기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절대적으로 종교를 믿는 신자의 그것으로 변해갔다. 그것에 점점 더 의지하며 나는 더 이상 마음이 가라앉거나 끓어오르지 않았다. 매사가 평온했다. 특별히 기쁠 일도, 좌절할 일도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성물'과도 같은 주머니 속 존재에 점점 더 의지하게 되었다.

믿음이 깃든 내 삶은, 그것의 말처럼 달라졌다. 그 믿음이 나를 배반할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밤에 잠들지 못하지도, 실체가 없는 불안한 미래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적확한 때에 내게 안도를 주는 말을 건넸다. 끊임없이 내 귓가에 속삭이며 내 마음을 빨아들였다. 그것이 내 피와 살을 탐한다는 사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그것은 점점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내가 보는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상황이었다. 그것의 더듬이가 주머니 밖 내 살결을 간지럽히면, 나는 슬그머니 그것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1초, 3초, 5초, 그것이 주머니 밖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 시간이 늘어날수록, 상황은 내 손아귀를 벗어나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처음 옷 위를 기어 다니던 그것은, 이내 손과 팔, 다리와 목, 급기야 내 얼굴 위를 훑고 지나갔다. 어두운 옷을 입고 있으면 가려졌던 그것의 움직임이,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확연히 눈에 띄었다.


- 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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