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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May 07. 2024

봄이면 떠오르는

봄이 되면, 풋사랑의 기억이 떠오른다.

초록이 짙어지고, 민들레 홀씨가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어느 날의.



짝꿍을 처음 만난 게, 아니 처음으로 그의 존재를 인지한 게 어디였는지는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전공 강의실이나 문과대학 앞 언덕배기 그 어디쯤이었을 거다. 대학 시절 짝꿍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예술가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흡사 초상화 속 베토벤처럼, 분위기 있게 흐트러진 갈색의 단발머리를 휘날리고 다녔기에, 나는 학생들로 붐비는 넓은 캠퍼스 내 어디에서고 뒤통수만 보고도 금세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근사근한 태도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에 곧잘 섞여 들었던 그인지라, 나는 그가 무난한 성장기를 거쳐 온 모범생일 거라 생각했었다. 나의 이러한 추측은 맞기도, 틀리기도 했다. 안경 너머 총명하게 번뜩이던 눈빛으로, 강의 중 불시에 교수님을 당황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던 그는, 학업적인 면에서는 모범생이었지만, ‘무난’하게 자라왔다고 말하기엔 생각보다 삐뚤빼뚤, 모가 많은 사람이었다.



짝꿍의 시선에 담겼던 내 모습이 어땠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언젠가, '나의 어떤 점이 좋았어?'라고 물어보는 내게, '너의 OOO이 좋았다'라며 대답했던 그가 기억난다. 그 순간의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무슨 대답이 그러냐?!'라고 핀잔을 주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OOO에 들어가는 단어가 나를 몹시도 쑥스럽게 만드는, 특정 신체 부위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의 콩팥이 좋아'라고 말하는 정도로 얼토당토않은 표현은 아니었고, 본인이 자신의 대답이 농담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농담이었다는 그의 말은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댄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나는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짝꿍도 이후 내게 비슷한 질문을 했고, 나는 그를 향한 ‘측은지심'이 나를 움직였다고 답했다. 물론, 지적인 남성을 선호했던 내 이상형도 한몫을 하긴 했지만, 측은지심이 나를 그에게로 이끌었던 건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소 어이없는 대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가, 차남으로서 차별받으며 부모님에게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라난, 상처 깊은 영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던 처지에, 내가 그를 보듬어 줘야겠다'는 오지랖을 부렸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나는,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으면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줘야겠다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인연으로 점지되어 있던 사이여서 저절로 그런 마음이 우러나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건 운명론을 믿고 싶어하는 내 착각일 테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서로를 아끼겠다는 약조를 하객들 앞에서 큰소리로 늘어놓고서도, 우리는 치열하게 다퉜고, 때론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서로 말 한마디 섞지 않으며 곧이라도 인연을 끝낼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함께 흘러오고서야 비로소 나는 우리가,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서로의 삶에 필요충분적 존재라는 믿음을 굳혀가고 있다.




비 오는 밤, 노곤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오늘도 가볍게 잔을 기울인다. 안줏거리를 사러 함께 간 편의점에서, 마치 소풍을 앞둔 어린애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눈빛을 반짝인다. 돌아온 집에서, 우리의 대화는 빗소리에 곁들어 주제와 주제를 넘나들며 이어진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특정 작가에 대한 소견, 사회적 이슈, 아이들과 반려동물들의 에피소드, 올여름휴가 계획으로 흘러가다 불쑥, 누가 더 이 세상에 오래 살아남아있을까, 하는 것에까지 이른다.



그럴 때면 생각이 든다. 모난 돌 두 개로 만나 거세게 부딪혀온 세월을 뒤로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더 둥그스름하게 맞추어진, 나머지 반쪽의 돌이 되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한편으론 알고 싶어진다. 나의 OOO이 좋았다,라는 그의 말이 진정 농담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를..



소식 하나 >

인형 친구들과 함께. 우리 제법 잘 어울리지 않나요?

새로운 식구를 맞이했어요. 이번에도 역시 네안이가 이름을 붙여주었네요. 새하얀 깃털이 천사 같은 이 녀석의 이름은 '두부'랍니다. (망고와 같은 왕관앵무 종이라, 언젠가 2세를 보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어요. ㅎㅎ) 신체 건강하고, 적응력도 좋아서 벌써부터 집안 이곳저곳을 엄청 활개 치며 다니네요.
잔망스러운 성격이 자몽이를 빼다 박은 것 같아, 한편으론 위로가 되고 또 한편으론 자몽이 생각에 아련해지기도 합니다.
사진 속 토끼 인형이 어쩐지 두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네요. 짝꿍은 조금 섬뜩한 느낌도 든다고 하지만, 제 침대 머리맡 인형 친구들과 잘 어우러지는 두부 모습이 넘나 깜찍하고 어여쁩니다. 자기도 그걸 인지하고 있는 건지, 여기가 이제 두부의 최애 스폿이 되었어요.
앞으로 간간이 두부 소식 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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