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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May 14. 2024

닭을 데리고 간 병원에서

쭈니도 커서 수의사 되는 건 어떨까?

오래간만에 방문한 동물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거금을 지불한 뒤 아들 녀석에게 물었다.

아들램은 별다른 답이 없었다. 내 질문은 그저 아이의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이의 근심 가득한 눈이 오롯이 향한 곳에는, 이제 생후 8개월 차에 접어든 '김치'가 있었다. 그럼에도 섭섭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이의 눈빛에서 나는, 갓난아기였던 아들램을 안고 다급히 찾아 간 병원에서 종종거렸던,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에 눈가가 시큰해졌다.



요 며칠 김치의 상태가 심상찮아 보였다. 더위에 지친 개처럼 부리를 벌리고 헉헉대는, 일명 '개구증상'을 보이는 횟수가 늘어갔다. 초록창을 열심히 검색해 이런저런 방법들을 취해 보았으나, 잠시 괜찮아지는 듯하다가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일쑤였다. 아직 닭 돌봄에 어설픈 우리는, 암탉인 김치가 무정란을 낳을 시기가 되었나, 오히려 기대감마저 품었다. 그러다 급기야 며칠 전, 선홍빛이었던 김치의 벼슬이 희멀겋게 변하는 듯했고, 아들램은 더 이상 걱정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김치를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며, 다급하게 나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동물병원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지 못했는데, 일단 병원이 거리상으로 부담되는 곳에 위치한 데다가, 내심 진료비에 대한 걱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흔히 걸리는 감기처럼 이러다 말겠지, 하는 대책없이 낙관적인 생각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건 아들램의 낯빛이었다. 김치의 증상이 호전되는 것 같지 않자, 아들의 안색마저 창백해져 갔고, 그제야 엄마인 나는 피곤한 몸을 꾸역꾸역 일으켜, 이웃도시에 있는 특수동물병원으로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퇴근 시간이 겹친 도로는 거북이걸음을 하는 차량들로 넘쳐났다. 아들램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나의 작은 차가 꿀렁거릴 정도로 불안한 듯 발을 동동거리기 시작했고, 잊을 만하면 '이러다 김치 죽으면 어떡해, 엄마!'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 아마도 녀석은, 얼마 전 세상을 뜬 자몽이의 마지막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안심시키는 내 말에 기대려다가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지옥을 오가고 있었으리라.



우리가 간 특수동물병원은 온갖 종류의 동물들 - 김치 같은 닭뿐만 아니라 앵무새나 뱀, 심지어 고슴도치와 기니피그까지 -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문구를 내걸고 있었는데, 그 말에 안심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내심 '특별히 진료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큰 비용을 원할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수의사는, 내 의심을 합리화시켜 주려는 듯,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전염병 이름을 거론하며, 혹여라도 김치가 그 병에 걸린 거면 갑자기 쓰러져 (언제고) 죽을 수도 있다는 말로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키며, 더 많은 진료비를 쓰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김치의 정확한 병명은 듣지도 못한 채, 비대칭의 정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수의사 앞에서 확연히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양계장이 아닌 가정에서 홀로 지내는 김치가 전염병에 걸릴 일이 뭐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닭은 본디 병에 취약한 동물’이라는 의사의 말에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결정을 주저하고 있는 내게 아이는 연신 다급한 눈초리를 쏘아대다가 급기야는,

"엄마, 나는 지금 내 몸보다 김치가 훨씬 더 신경 쓰여."라는 말로 내 의심의 장벽을 낮추고야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수의사가 하자는 대로 다 따른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제시한, 손가락으로 세기도 힘든 여러 가지 값비싼 진료들 중, 일차적이고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에 동의하며 아들 녀석을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아들램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던지, 김치가, 수의사가 제시한 그 모든 치료를 받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쭈니야, 이 치료들만 하더라도 엄마가 1년 동안 쓰는 병원비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이 들어.”

그건 사실이었다. 엑스레이다 뭐다 해서 드는 비용이란 게, 며칠간 사무실 의자에서 엉덩이 욕창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을 버텨내야만 내 손안에 쥘 수 있는 금액이었다. '역시 전문직이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진료에 동의한 뒤, 치료를 위해 김치를 홀로 남겨두고 아들과 함께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진료실 앞에 웬 노신사 한 분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흡사 수술실 앞에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의 표정을 하고 서 있던 그의 모습에서, 반려동물은 단순히 함께 사는 동물이 아닌, 거의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다행히 며칠이 지난 지금 김치는,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가뿐히 회복하는 김치를 보니 다시금 불안감을 담보로 수의사에게 낚인 것 같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한들 어떠랴. 김치 걱정에 가슴을 졸이고, 불안한 눈빛으로 갈팡질팡하는 아들램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어쩌면 내가 지불한 금액의 가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들램의, '김치 약 잘 챙겨 먹였냐'는 잔소리만큼은 잦아들지 않고 있지만.



지금 아들은, 김치에게 아빠 역할을 하며, 평소에 쉬이 갖기 힘든 공감과 배려의 마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아들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도 덩달아 마음의 키가 자라나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김치가 지금 여러 사람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왠지 웃픈 미소가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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