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미친PD’ 작가의 북토크
종로 근처에 갈 일이 있을 때면 - 혹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 들르는 북카페가 있다. 카페의 이름은 ’오티움‘, 라틴어로 휴식, 틈, 여가를 의미한다. 작년 봄에 문을 열었으니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북카페다. 본디 책과 커피, 때론 맥주 한 잔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북카페를 좋아하지만, 오티움은 내게 좀 더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되어 있다. 목공을 애정하고, 갈고닦은 목공 기술로 만든 스피커 회사의 사장이 되었던 주인장의 독특한 이력이 이러한 특별함을 더해준다. 물론 전직 공영방송 사장이었다는 프로필 또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나.
오티움은 짝꿍과 함께 방문하는 곳이다. 첫 방문 길을 함께 한 이후로, 마치 정해진 일인 것처럼 오티움을 가는 길의 내 곁에는 늘 그가 있었다. 종로의 좁은 골목 한편, 시야에 잘 띄지 않는 자그마한 간판을 찾지 못하는 나의 ‘길치’력 탓이기도 하지만, 함께 하면 배가 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오티움이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을 곁들여, 비치된 샘플북들을 들여다 보고, 책을 구매했던 첫 방문 이후로, 지난 수십 년간 기념비적이었던 대중음악을 훑었던 개업 1주년 기념행사, 클래식 음악 감상회와 북토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오티움에서 평소 경험하기 쉽지 않았던, 다채로운 행사를 즐기고 있다. 특히, 지난 5월 오티움에서 열렸던 음악 감상회에서는 우리나라 젊은 피아니스트의 대표 격인 조성진, 임윤찬, 손열음의 공연을, 주인장이 직접 제작한 스피커를 통해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무아지경으로 이끄는 황홀하고 스펙터클한 사운드 덕에, 콘서트 현장에서 연주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클래식 음악에 온몸이 흠뻑 젖어들도록 몰입해 있다가 귀가하던 봄밤의 발걸음에는, 일주일 간의 고단한 일상으로 덕지덕지 붙어있던 묵은 때들이 말끔히 씻겨나간, 한결 가벼워진 리듬이 실렸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드디어, 오티움에서 브런치 미친PD작가(이석재 작가님, 이후 이석재 작가로 통칭)의 북토크가 열렸다. 브런치에서 함께 글을 쓰며 간간이 댓글로 소통하던 그의 첫 북토크가 오티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가움을 넘어선 놀람과 설렘을 느꼈던 것 같다. 짝꿍과 함께 즐기는 오티움에서, 짝꿍이 좋아하는 스포츠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접목한 북토크를 연다니, 마치 우리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그러한 자리에서 이석재 작가와 첫 대면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평소 오티움을 방문할 때보다 몇 배는 더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삼 년 넘게 브런치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은 이웃 작가님들과 소통을 나눌 때이다. 간혹 댓글로 오가는 이야기들이 대면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소통의 끝판 왕을 만나는 것 같아, 평소 분비되지 않던 엔도르핀이 마구 샘솟아나고, 삶에 대한 만족감이 급격히 높아지는 현상을 경험하곤 한다. 더욱이 북토크 현장에서 작가와 독자로 만나는 만남을 통해 그러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건, 단순히 말 몇 마디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고양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석재 작가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자극을 받아, - 그는 한강 작가의 대학 동창이다. 한강 작가의 연락처도 있다고 슬쩍 어필도.. ㅎㅎ - 프로젝트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글쓰기와는 먼 삶을 살다가 돌연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글쓰기 플랫폼을 물색하던 중, 브런치라는 신세계를 발견하고 작가 신청에 도전해 한 번만에 통과하는 기염(?)을 토하며, 문학을 사랑하던 국문과 4년 차로서의 실력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역시 발전적인 자극을 주는 친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 사람의 생애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주는 것 같다. 한강 작가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이석재 작가는 독자의 위치에서, 충실한 스포츠 전문 PD로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지 못한 채, 잠재적인 글벗과 독자들을 놓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물론 나 또한, 미친PD라는, 소중한 글벗을 만나는 행운과 맞닥뜨릴 수 없었을 것이고.
더위를 시원하게 식혀 주는 아이스라테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이석재 작가의 북토크가 시작되었다. 행사 시작 전 다소 긴장되어 보였던 그의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곳에 참석한 독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넉살 좋은 입담이, ‘초보 작가’라는 타이틀을 무색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포츠 영화에 관한 그의 관심과 지식은, 준비된 멘트 한 줄 없이도 끊임없는 물살처럼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나와 짝꿍의 감탄을 자아내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정도로 한 분야에 진정한 오타쿠가 되어야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탄생될 수 있을 만큼의 글이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애청하던 K본부의 ‘역사저널 그날’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던 이광용 아나운서의 진행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이번 북토크에서는 독자로서 더욱 친근하게 저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좋았고, 평소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스포츠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와 나의 ’열정 세포‘를 자극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저자의 글은 스포츠를 잘 모르는 이도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게 쓰여 있다. 게다가 잠시도 지루할 틈 없이, 책 한 권을 거의 통독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세심하게 책의 내용을 짚어 주며 진행된 북토크가, 스포츠와 영화에 대한 지식과 흥미를 순식간에 넓혀주는 듯했다. (이석재 작가는 대중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현재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도 부런치에 부지런히 연재하고 있는 중이니, 그의 방식으로 흥미롭게 엮어 낸 음악 이야기를 책으로 접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오티움이 생긴 이후, 후미진 골목 한 편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종로는 사뭇 다른 지명으로 다가온다. 맛난 커피, 분위기 좋은 와인과 함께 장르를 불문한 음악과 책을,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이곳에서, 나는 일상에서 쪼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게 된다. 가쁘던 숨을 고르고, 천천히 그리고 깊게 심호흡하게 된다.
북카페 오티움에서 만나는 이들이 반갑다. 비록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어쩐지 그들이 내 벗인 듯 느껴진다. 이 공간을 매개체로 느슨하지만, 열정에 가까운 온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므로 오티움에 존재하는 ‘틈‘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막힌 숨구멍을 뚫어주며 우리의 심신을 더 건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귀한 존재인 것이다.